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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0 17:24 수정 : 2019.09.21 16:01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하리 마르틴손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974년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몇권의 책이 국역되고 그 뒤에는 더 출간되지 않았다. 노벨상 받은 것 말고는 딱히 돋보이는 이력이 없는 작가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마르틴손은 조금 특별하다. 아마 그보다 불행한 노벨상 수상 작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노벨상 위원회는 세 작가의 존재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러시아/미국), 그레이엄 그린(영국),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이 셋은 위협적으로 유명해서, 잘 처리하지 못하면 상의 권위에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1965년 이들 모두가 최종심에 올랐다. 그러나 수상자는 <고요한 돈강>의 미하일 숄로호프(소련)였다. <고요한 돈강>은 노벨상 수상작들 중 유례를 찾기 힘든 표절작이다.

노벨상은 기다리는 작가도 많지만, 기다리는 국가와 언어도 많다. 숄로호프의 수상 이유가 무엇이든 러시아 망명 귀족 나보코프의 차례는 멀어졌다. 1967년 <대통령 각하>의 미겔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가 수상하면서 보르헤스의 차례가 멀어졌다. 이때 그린은 3연속으로 최종심에 오른 상태였다.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의 수상으로 보르헤스는 적어도 노벨상 위원회가 총애하는 라틴아메리카인은 아님이 드러났다. 1974년 나보코프, 그린, 솔 벨로(캐나다/미국)가 최종심에 올랐다. 보르헤스도 이 명단에 있었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영국은 처칠(1953년) 이후 20년 넘게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그린의 수상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지금은 ‘영원한 노벨상 후보’로 보르헤스를 생각하는 경향이지만, 70년대 한국인에게 물어보면 다들 그린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수상자는 스웨덴의 에위빈드 욘손과 하리 마르틴손이었다.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8명이다. 운영 주체를 생각하면 놀라운 숫자는 아니다. 이런 스칸디나비아 프리미엄은 오히려 외국인이 비판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번역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4년 수상자들은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신랄한 조롱을 받았다. 두 작가 모두 노벨상 선정 기관인 스웨덴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요즘 말로 ‘셀프 추천’과 ‘교환 추천’, 그리고 ‘셀프 선정’ 의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태의 진실은 2024년 관련 문서가 비밀 해제되면 밝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서철에서 딱히 불미스러운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해도, 노벨상 위원회가 자기 회원들에게 상을 안긴 사실 자체는 뒤집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권위 있는 상이 아니라 하나의 만신전(萬神殿)이고 전 세계인이 국민적 자존심을 걸게 된 이 특별한 상에 썩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섬세한 성품의 마르틴손은 언론과 평론가들의 냉대에 괴로워하다가 197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위를 사용한 끔찍한 자살이었다. 그는 노동자 출신으로, 본래 시인이다. 그의 단편소설 중에는 환상적이고 분위기가 아주 묘한 것이 있어서 가끔 꺼내서 읽어보곤 한다.

공동 수상자 욘손은 1976년 타계했다. 그해 솔 벨로는 노벨문학상을 손에 쥐었다. 다음해 나보코프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채 타계했다.

보르헤스는 1986년 타계했다. 그는 1976년 피노체트와 악수하며 덕담을 나눈 일이 있는데, 이후 수상 가능성은 물 건너간 것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린은 노벨상을 받지 못한 채 1991년에 타계했다.

스웨덴인들이 자국인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뽑은 것은 마르틴손 이후 거의 40년이 지난 2011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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