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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30 18:00 수정 : 2019.08.30 19:15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여름과 가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된 이 도시는 연일 난리법석이다. 에포케(epoche)! 견디기 힘든 이 소란으로부터 잠시 몸을 숨기고 일상의 판단을 중지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내게 허락된 나만의 아지트는 없다. 늦여름 오후 세시, 내리쬐는 뙤약볕을 감수하고 공원행을 결심했다. “공원은 분주한 일상에서 괄호와 같은 존재다”라는 작가 폴 드라이버의 나른한 표현을 떠올리며.

한강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선유도공원을 택했다. 겸재 정선이 즐겨 그린 선유봉, ‘신선(仙)이 노니는(遊) 봉우리(峰)’라는 이름처럼 빼어난 절경과 넉넉한 풍류를 자랑하던 곳이다. 을축년(1925년) 대홍수 뒤 한강변에 제방을 쌓느라 암석을 채취하면서 단아한 봉우리가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양화대교 건설과 한강개발사업은 끝내 산을 섬으로 바꾸어놓았고, 새로 태어난 흉물의 섬은 한강에 버려졌다. 197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정수장이 가동되면서 이 섬은 있는지도 모르는 곳, 미지의 땅이 되고 말았다. 사회지리학자 앨러스테어 보네트가 <장소의 재발견>(책읽는수요일, 2015)에서 찾아 나선 “지도 바깥에 있는”(off the map) 장소의 단적인 사례다.

“도시란 자연을 도려내는 장소인 동시에, 뒤늦게야 자연을 애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보네트의 말처럼, 선유도는 2002년 한강 최초의 섬 공원이자 국내 최초의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다시 지도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절경의 봉우리에서 버려진 섬으로, 숨겨진 물 공장의 폐허에서 숭고의 미감을 발산하는 공원으로 변신을 거듭한 선유도를 산책하며 이제 우리는 한강의 시간을, 서울의 기억을 넘나들 수 있다.

여느 때처럼 한그루 키 큰 고목이 나를 반긴다. 높이 9m의 콘크리트 옹벽 아래 둔치에서 목재 데크를 관통하며 뻗어 올라온 나무는 이 땅에 쌓인 시간의 지층이 얼마나 두꺼운지 쓸쓸히 고백한다. 선유도공원에서는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여러 갈래의 길이 여러 층의 공간과 뒤섞이면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두터운 시간 경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두께를 더 두껍게 하는 것은 경험자의 몫이다.

벌써 성년이 가까워오지만 선유도공원의 풍경은 여전히 낯설다. 아니, 자유롭다. 풍성한 수목, 푸른 잔디 카펫, 곡선형 호수의 조합이라는 표준 식단을 강박적으로 폭식하여 만성 소화불량에 걸린, 전형적인 공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선유도공원의 자유로운 감흥은 사진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각이라는 단일한 지각 경로를 넘어서는 공감각적 경험을 초대한다. 한눈에 잡히지 않는 풍경 속의 나무 한그루, 한뼘 그늘, 벤치 하나에는 이미 어느 유년과 청년과 노년의 내밀한 기억들이 오롯이 새겨졌다. 낡은 것은 낡은 채로, 새것은 새것대로.

여름 한낮의 공원은 텅 빈 여백의 진수였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원 전체를 홀로 전세 낸 기분을 즐기며 마음껏 어슬렁거렸다. 한숨에 다가오는 서울의 풍경과 냄새, 뜨거워진 살갗에 와닿는 서걱한 강바람, 울퉁불퉁한 시멘트 기둥의 생살과 지워지지 않는 물 얼룩의 물성에 포개진 녹색 생명의 힘, 허물어진 콘크리트 잔해와 새로운 철재가 동거하며 빚어내는 낯선 미감. 땀 흘리는 움직임보다는 사색의 발걸음을 이끄는 산책로를 제멋대로 걷다가 줄지어 선 미루나무 아래 좁은 그늘에 몸을 숨겼다. 바삭바삭한 바람에 취해 한참을 멍하게 보냈다. 실용과 유용과 효용이 지배하는 도시를 잠시 괄호 안에 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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