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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22 18:33 수정 : 2019.02.22 18:55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해는 시인 김수영의 50주기였고, 올해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50주기다. 시인 기형도의 30주기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대산문화재단이 오랫동안 진행해온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의 대상 문인들만 해도 구상, 김종문, 김성한, 전광용, 정태용, 정완용, 박홍근, 권오순과 같이 다채롭다. 독자 입장에서는 아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의 연륜이 축적되다 보니 거의 매해 문인, 연구자, 문학단체, 관련기관, 지자체 등에서는 작고 문인들에 대한 기념사업이나 행사를 열고 있다. 보도가 안 되고 있을 뿐이지, 이런 유형의 크고 작은 행사는 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기억에도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분절하여 문학의 의미를 묻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다.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의 입장에서도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김수영과 신동엽, 구상과 정태용의 시와 비평을 회고하고 음미하는 일은 어렵다. 모처럼 기념의 계기가 있어 김수영과 신동엽을 읽고, 구상을 생각하고 정태용의 행적을 복기하게 되는 행운에 직면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기억과 평가라는 것 역시 주관적인 동시에 상황적이다. 문학은 물론 문인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고정될 수 없다. 올해 사후 50주기를 맞는 신동엽을 생각할 때, 나는 그의 작품, 이에 대한 연구도 검토하게 되는 것이지만, 유독 어떤 에피소드가 강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가령 문학평론가 남기택의 <신동엽, 융합적 인간형의 구상>을 읽다 보니, 그가 객석에 있었던, 199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신동엽 30주기 당시 심포지엄의 풍경이 떠올랐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기택의 글에 따르면, 당시 평론가 유종호는 “신동엽이 포용하고 있던 혁명적 낙관주의 혹은 낭만주의나 소외 없고 착취 없는 원시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거대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며, 그 특유의 형식주의적 문학관 및 정치적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신동엽 문학의 한계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객석에서, 대학 시절 신동엽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는 한 노인이 유종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남기택의 글에는 그가 “크로포트킨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되어 있으나, 내 기억에는 “선생님은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종호는 “영어 번역본으로는 읽은 것 같습니다만” 식으로 주춤했던 것 같다. 신동엽의 친구가 <도덕경>을 거론하는 이유는 신동엽 문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민중주의나 아나키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동엽 시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유종호는 그의 사상이 어떠하건 일단 시는 잘 빚어진 언어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던 것 같다.

작품을 해석·평가하는 장에서 간혹 가족과 지인들의 기억·증언·회상이 중요하게 참조되는 경우를 발견한다. 반면 비평가나 연구자들 역시 주관을 일반화할 때가 있음도 분명하다. 시어의 능란한 운용의 관점에서 신동엽 시의 한계를 비판하는 유종호의 시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와 사상이라는 게 마찰하면서 공명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학 시절 함께 자취했던 지인의 개인적 기억에 의존한 반박 역시 논리적이기보다는 우정에서 비롯된 회한으로 느껴졌다.

잘 기억하고 합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어렵다. 인간사에는 얼마간 뜨겁고 서늘한 정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더 자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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