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28 18:12
수정 : 2018.12.29 12:30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교수·도시연구자
얼마 전 끝난 학기에 가르친 대학원 과목 이름에는 ‘도시재생’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수강생 대다수가 속한 대학원 이름은 ‘사회적 경제’이고, 세부 전공 이름은 ‘마을공동체’이니,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라는 비중 있는 세 주제가 연결되어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세 주제는 학문적 관심을 넘어 공공적 실천을 수행하는 활동가들의 주요 화두다. 국가 주도 개발주의에 이어 시장 만능 신자유주의에 의해 찢기고 갈라진 사회적·공동체적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획득했고, 담론이 형성되고, 실천이 탄생하고, 정책이 입안되었다. 즉, 도시재생은 폭력적인 철거 및 (재)개발, 사회적 경제는 고삐 풀린 시장경제, 마을공동체는 개인주의적인 이윤 추구가 지배해온 삶과는 ‘다른’ 삶을 모색하는 공적 어젠다로 확립되었다.
최근에는 세개의 기획이 얽히고, 되섞이고, 뒤엉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마을공동체까지 함께 살리는 도시재생’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로 푼다’ ‘마을공동체와 사회적 경제, 협동의 길을 모색하다’ 등의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상이한 실천들 사이의 연계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무언가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근본적 의문은 세 사회적 어젠다의 목표가 논리적으로 상충한다는 점이다. 도시재생은 ‘활성화’를, 사회적 경제는 ‘혁신’을, 마을공동체는 ‘복원’을 각각 목표로 한다. ‘활성화’와 ‘혁신’과 ‘복원’ 사이에 대립과 갈등 없이 원만한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 대부분은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처음에는 나의 주장이 ‘선의의 정책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대화와 소통이 이어지면서 본인들이 현장에서 겪는 혼란과 피로감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공유했다. ‘수도권에는 도시재생이 굳이 필요 없다’ ‘너무 쉽게 대안이나 희망을 말하지 말자’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이던 나의 발언에 대해서도 그 진의를 이해해주었다. 도시재생이란 것은 “사람이든 토지든 ‘잉여’에 대한 통치술”이라는 나의 지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그 통치술을 명확히 이해해야 도시재생이라는 미명하에 마을 활동이 건물주의 이해에 질질 끌려가거나 공무원의 정치적 필요에 동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가 더 많았다.
그런데 반전. 2018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는 이 어젠다마저 정책에서 뒷전으로 밀리는 신호가 보인다. 상반기에는 장위동, 하반기에는 아현동에서 재개발·재건축을 이유로 아주 익숙한 폭력이 자행되더니, ‘3기 신도시’라는 더 익숙한 대규모 도시개발 계획까지 발표되었다. 정부 스스로 ‘수도권에는 도시재생이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래된 개발주의라는 ‘적폐’를 소환하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어쨌거나 내 지론 따위에 대한 토론은 접어두고, ‘제발 폭력적 박탈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최소한의 생존권에 대한 요구로 다시 돌아가야 할 판이다. 권력의 논리로는 ‘잉여의 생존’보다는 ‘중산층의 복지’가 훨씬 중요한 모양이니 말이다.
새해를 맞고 몇주가 지나면 용산 참사 10주기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간 것 자체가 허망한 게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이 허망하다. 도시빈민 운동가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되어도 도시개발의 패턴이 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정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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