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11 19:10
수정 : 2016.03.11 19:49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 장편소설 <어려운 시절>(1854) 첫 장면에는 근대교육의 본질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른바 ‘사실과 계산의 인간’ 그래드그라인드 씨가 곡마단 출신의 20번 학생 씨씨 주프에게 “말(馬)에 대해 정의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씨씨 주프는 미처 답변하지 못하고, 동료 학생 비쩌가 말에 대해 사전적 정의를 내린다. “네 발 짐승. 초식동물. 이빨은 마흔 개로 어금니 스물네 개, 송곳니 네 개, 그리고 앞니 열두 개. 봄철에 털갈이를 하고 습지에서는 발굽갈이도 함. 발굽은 단단하지만 편자를 대어붙여야 함. 나이는 입 안쪽의 표시로 알 수 있음.”
그러자 오직 사실(fact) 숭배자를 자처하는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에게 절대로 ‘상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어떤 목적을 가졌든 증명하고 논증할 수 있는 도형의 조합과 변형을 (원색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발견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안목이다”라고 주장한다.
찰스 디킨스는 위 에피소드를 통해 자와 저울 그리고 구구표로 표상되는 산술과 추상의 정신에 기초한 공리주의적 근대교육의 목적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한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일면적이고 형식적인 합리성을 가장하는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의 허구성을 폭로한 것이다. 찰스 디킨스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상상력의 은총과 기쁨을 통해 기계장치와 현실에 억눌린 삶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교육은 ‘사실’을 단순히 암기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은총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는 교육철학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다. 고2 때 겪은 셋째형의 죽음 이후 치른 나 혼자만의 고독하고 격렬한 ‘홈스쿨링’과 더불어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의 ‘어른’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나 자신일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나는 그때의 대책 없는 방황의 시간을 통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삶보다 나를 ‘표현’하는 삶이 더 멋질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내가 경험한 문학수업이었고, 예술수업이었다. 문학수업과 예술수업은 십대 아이들의 인생길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마음의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실감했다. 그것이 바로 상상력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십대 아이들과 함께하며 정서적 지원을 하는 감동적인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삼월 신학기가 시작되었지만, 경기도 학교의 경우 학교 예술강사 파견사업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2012년부터 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학교 예술강사 파견사업을 수탁해 운영해온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사업을 ‘반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각 시도에서 운영하는 광역센터가 수백명의 예술강사를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의무를 져야 하고, 법적 책임마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광역센터로서는 업무 권한은 없고 책임만 져야 하는 중앙정부의 지침 행정이 야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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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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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상상력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경기도 내 학교 현장의 아이들이다. 현직 교사인 정은균이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교육 현장에서 학력(學歷)이 아니라 학력(學力)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학력(學力)의 의미는 시험, 사실, 양적인 측정을 넘어설 때 가능하고, 그것은 예술(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부름에 응답(respond)하는 행위가 바로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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