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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23 18:26 수정 : 2015.10.23 18:26

권력은 위인전을 좋아한다. 인물 중심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문학장치는 없다. 어느 사회든 인물이 강조되는 것과 비례해서 자유와 제도는 시든다. 그 권세들이 진짜 황홀해한 건 위인전보다는 자신에 대해 쓴 전기였다. 죽은 뒤 후학들이 쓴 행장록도 아니요, 살아서 스스로 쓰되 죽은 뒤에 돌에 새길 자찬 묘비명도 아닌, 산 자의 위인전기 말이다.

서정주는 대통령 전기를 써서 실패한 뒤에도 대통령 송가(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를 또 썼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서 받은 구술을 기초로 책을 출간했다.(1949) 대략 두 해 가까이 걸린 역작이었다. 전기를 쓸 문인을 이승만에게 소개한 이는 윤보선이었다. 이 통치자 이야기책은 예상과 달리 내무부 치안국이 나서서 모조리 회수했다.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박사전. 작가가 각하를 비판하거나 논점이 어긋나게 굴었던 건 아니었다. 그의 인생 노정에서 이는 그닥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이승만은 자기 아버지를 높여 부르지 않은 전기를 마뜩잖아했다. 내용도 중요했지만 효가 깃든 숭배체를 요구했던 셈이다. 과연 국부답다고 하겠다. 책이 다시 찍혀 나온 건 이승만 하야 35년 만이었다.(1995)

‘국부’ 찬양이 정점을 이룬 건 1875년생인 대통령의 여든 살을 기리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송시 17편을 아예 시집 한 권으로 묶어 헌정한 조영암의 작업은 선제적이었다. 우남찬가.(1954) 머리글은 이기붕이 썼다. 그 첫 줄에 ‘민족적 태양’이라는 숭앙 어린 언사가 등장하고, 제1부 두번째 시이자 표제작 ‘우남찬가’ 1연은 ‘님을 태양이라 / 부르지 않는데도 / 님의 빛은 / 강토 샅샅이 비치십니다’로 시작하고 있다. 같은 해 찍어낸 <위인 이승만 전기>(이갑수)에 머리글을 받들어 올린 문교부 장관 이선근은 만주에서 관동군에게 군량미를 대던 사람이었다.

통치기간 동안 나온 이승만 전기류 산문과 운문은 스무 종이 넘는다. ‘인간태양’은 분단 조국 남과 북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1956년에 나온 성장세대를 위한 <대한민국의 아버지 우남 리승만 박사전>(박성하), <민족의 태양: 우남 이승만 박사 평전>(김장홍, 경찰도서출판협회)은 더 대중적인 숭배 텍스트인 <국부 리승만 박사 그림전기>(1957)로 이어진다.

각하의 전기에서 뺄 수 없는 특성은 추천사다. <우남 노선>(1958)은 10쪽이나 되는 화보 뒤에 아예 추천사 차례가 따로 붙어 있다. 입법부는 의장 이기붕을 비롯하여 7명, 사법부는 대법원장 조용순, 행정부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 이하 각 부처 장관과 청장 등 16명, 군부는 참모총장 백선엽 등 6명, 그밖에 문봉제 등 3명이 헌사를 바치고 있다. 머리말까지 합쳐 34명의 추천사가 빼곡하다. ‘국부님의 위대하신 지도이념과 그 거룩하신 실현과정을 천명한 이 책자’라는 언설은 백선엽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이다. 공보실(실장 전성천)이 발행한 ‘하시첩’(1959)은 각처 유림 116명이 84회 탄신에 맞춰 만수무강과 회춘을 기원하면서 모신 한시집이다.

서해성 소설가
살아 있는 통치자와 문학이 전기물 따위로 조우하는 것은 문학예술에서 가장 비극적인 타락이다. 태양의 언어는 인간에게 헌정되어서는 안 된다. 팔순을 맞아 파고다공원과 남산에 차례로 건립되었던 이승만 동상이 4월혁명으로 무너져내린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가 머잖아 국정교과서를 타고 국부로 귀환하려는 모양이다. 그 교과서는 끝내 동상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위인전을 기꺼워하신 각하가 어디 그뿐이었던가.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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