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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7 19:44 수정 : 2017.12.28 16:18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진단
유럽통합의 주춧돌이었던 유로
제도적 장치 미비한 단일통화
유로존 위기의 근본 원인

유로-공동 통화가 어떻게 유럽의 미래를 위협하는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박형준 옮김/열린책들·2만5000원

한 부부가 결혼상담소에 왔다. “참고 살자니 계속 고생할 것 같고, 헤어지자니 그간 들인 공이 아깝다”고 한탄을 한다. 가만히 듣던 상담소장은 “같이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행복하려고 결혼한 것 아니냐. 부부 관계를 확 뜯어고치거나, 그럴 자신 없으면 헤어지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이 비유에서 부부는 1999년 1월1일 출범한 유럽연합(EU)의 단일통화 체제 ‘유로’고, 상담소장은 2001년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이다.

12개국 유로존(현재 19개국으로 늘어남)의 첫걸음은 벅찬 희망과 함께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수천만명이 숨진 참극을 반성하며 추진해온 ‘하나 된 유럽’의 이상, 즉 경제통합을 거쳐 정치통합에 이르는 길에 놓인 주춧돌이란 찬사가 유로에 쏟아졌다. 단일한 통화, 자유로운 자본 및 노동의 이동이 주는 경제적 시너지는 라이벌 미국과 어깨를 겨룰 만한 힘을 유럽에 선사할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역시 달랐다. 썰물에 바닥이 노출되듯 2008년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유로존의 취약점을 드러냈다. 위기의 진앙은 미국이었지만 홍역은 유럽이 호되게 치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이 차례로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흔히 말하듯 분수를 모르고 ‘복지파티’를 즐긴 나라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북구의 모범생이라던 핀란드마저 높은 실업과 낮은 성장에 고생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계산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5년 사이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유로존의 국내총생산(GDP)은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유로존 국가 간 격차도 벌어졌다. 독일의 국내총생산은 2007년에 그리스의 10.4배였지만 2015년에는 15배로 확대됐다. 무엇이 유로존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스티글리츠는 2016년 출간해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유로>에서 현재 유럽이 겪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한가운데에 태생적으로 잘못 설계된 유로가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사정이 다른 여러 나라가 한몸처럼 돌아가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채 단일통화만 앞세운 결과, 비효율과 불균형이 누적됐다는 것이다. 단일통화와 유로존 경제의 허약한 실적은 “단순한 상관관계가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진단이다.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채 단일통화를 시도한 유로가 유로존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여기서 ‘미국은 웬만한 유로권 국가보다 큰 50개 주가 달러라는 공통의 화폐를 잘 쓰는데 유럽은 왜 안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의 지출이 국내총생산의 20%(유럽연합은 1%)에 이를 만큼 중앙정부가 통합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유로존이 오래갈 만한 시스템이 되기에는 경제통합과 정치통합의 간극이 너무 컸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비판이다.

유로를 쓰게 되자 독일이나 프랑스 등 경제 강국의 수준에 맞춰 유로존의 이자율이 내려갔다. 이는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주변국에는 경기부양 효과를 가져왔다. 수입이 늘고 경상수지 적자가 쌓여갔다. 은행들은 호황인 이들 나라에 앞다퉈 대출을 해줬다. 이 돈은 부동산으로 흘러가 자산가격 거품을 일으켰다. 경상수지 적자국의 반대편에는 지속적인 흑자국이 있었다. 독일이 그런 나라였다. 2000년대 초 ‘하르츠 개혁’으로 노동비용까지 낮춰 수출 경쟁력을 키운(내적 평가절하) 독일은 유로존에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내고, 이를 이들 나라에 대출해줬다. 결국 유로존은 한쪽에선 빚이 쌓이고 다른 쪽에선 받을 돈이 늘어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조정 시스템의 미비는 위기 때 문제가 도드라졌다. 경기가 침체하거나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해서 늘어나면 대개의 나라는 이자율과 환율을 조정해 불균형을 시정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고정된 환율과 단일한 이자율로 묶인 단일통화권에 소속된 국가는 개별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남은 것은 재정정책인데, 유로존에선 이마저도 출범 당시 합의한 엄격한 적자 상한선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았다. 일찍부터 위기에 빠진 그리스나 포르투갈, 스페인의 진짜 문제는 방만한 재정운용이라기보다는 단일화폐 자체라는 것이 스티글리츠의 진단이다.

2008년 위기 이후 이들 국가에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으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가 제시한 처방은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늘 강조하는 긴축정책이었다. 이는 실업자를 구제하고 경기를 회복시켜야 하는 위기 국가에 마지막 남은 수단마저 빼앗는, 거꾸로 된 처방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유로의 창설과 진화 과정에서 시장근본주의와 기업 엘리트의 시각이 많은 것들을 인도했고 이것이 결국 유로화 프로젝트를 망쳤다고 진단한다.

유로를 단일통화로 쓰고 있는 유럽 국가들. 게티이미지뱅크
지금의 유로는 애초 꿈꾸었던 통합과 번영보다는 분열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판단이다. 그리스 국민이 투표로 부결시킨 구제금융 조건을 강압적으로 이행케 하는 유럽연합 주도국의 모습에서 위기 국가의 국민은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유로권이 아닌 영국이 지난해 6월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이민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바닥에는 유로존이 이렇게 되어가는 데 대한 환멸도 적지 않았다.

스티글리츠는 “유럽 프로젝트는 인간의 이상에 담긴 힘의 증거”라며 “이 프로젝트가 유로화 때문에 실패한다면 세계 모두에게 비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로존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는 근본적인 개혁을 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제대로 관리된 방식으로 단일통화 실험을 끝내는 것을 생각할 때라고 말한다. 둘 다 어렵다면 각국이 여전히 유로화로 교역하지만 ‘그리스-유로’, ‘키프로스-유로’ 혹은 ‘독일-유로’ 등 서로 다른 가치로 교환되는 ‘유연한 유로’로의 전환도 현재 유럽의 연대 수준에서 고정환율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를 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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