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베를린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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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사이에서] ⑤ 우크라이나
자원 입대한 여성전사의 꿈
“현재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많이 실망스러운 면도 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나의 조국이다.”
지난달 <한겨레>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만난 마리아 베를린스카(28)는 꼭 1년 전인 지난해 5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과의 내전이 발생한 이래 지금까지 자원 전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국의 진정한 독립이 개인의 꿈보다 먼저”라는 믿음에서다.
내전 초기에는 직접 경비행기를 조종해 반군 지역에 대한 정찰비행을 했다. 그게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뒤, 올해 초 키예프에 정찰용 무인기(드론) 교육센터를 세웠다. 지금도 전선에서 무인기 정찰 요청이 오면 언제든 달려간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자원 전투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앞서 지난 2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가 운용하는 무인기는 20km도 못날아가는 장난감 수준이지만 그마저도 부족하다”며 “지금 우크라이나 군은 눈을 가린 채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28살 마리아 베를린스카광장 시위에 나섰다가 전선으로
현재는 정찰용 무인기 교육중 -우크라이나에서 여성은 병역의무 대상이 아니다. 왜 자원해서 전선으로 갔나?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러시아 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해 2월부터 ‘마이단 시위’에 참여했고, 9월에 전선으로 갔다. 내 민족,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 힘들진 않은가? (이 질문에 마리아 베를린스카는 한참이나 굳게 입을 닫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전선에서 경비행기를 조종해 항공정찰을 했다. 비행하던 중 친러 반군들의 총격도 받았다. 사람을 잃을 때가 가장 힘들다. 지난해 마이단 시위 때도 그랬고, 전선에서도 그렇다. 옆에 함께 있던 동료를 잃을 때…. -전투원으로 자원하기 앞서 마이단 시위에는 왜 참여했나? ‘마이단은 우리에게 나라를 준 곳이다. 마이단 덕분에 우리들 각자에게도 국가가 ‘존재 의미’로 다가왔다. -드론교육센터를 세운 이유는? 지금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갈등이 있다. 우린 그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드론교육센터가 그런 역할의 일부를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해내고 있다. 항공정찰은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우크라이나 전사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마이단 시위 때나 전선에서 심각한 위험을 겪은 적이 있나? (그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동안 입을 닫았고,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물론이다. 전쟁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마이단 시위 때,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쳐서 병원에 실려가는 걸봤다. 키에프의 도심 광장에서 특수부대 저격수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봤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결심했다. 시위 현장, 사람들이 죽고 있는 현장으로 가기로. 부모님께 작별편지를 썼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마이단 시위 현장에 있었다.” -본디 꿈은 무엇이었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음악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 꿈의 우선 순위를 미뤄두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독립이 먼저다. 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낙하산을 타고 싶다.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 -하지만 당장 러시아와 분쟁이 완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두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조국이 먼저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가족들은 지금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아나?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어느 부모라도 그렇듯, 내 엄마도 딸의 안전에 걱정이 크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로서는 너가 걱정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으로서 너가 자랑스럽다’고…. 키예프/글·사진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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