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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8 16:51 수정 : 2017.12.08 20:02

[황진미의 TV 톡톡]

이토록 실시간인 드라마가 있을 수 있나. <의문의 일승>(에스비에스)을 보고 터지는 탄성이다. 드라마는 탈옥한 사형수가 거액의 비자금과 엮이는 이야기를 담는다. 잠깐 교도소 밖으로 나온 사형수(윤균상)가 사체를 유기하던 국정원 직원들과 딱 마주친다. 우연처럼 시작된 서사는 곧 ‘전직대통령의 천억 원대 비자금’이라는 거대한 몸통을 드러낸다.

폭로의 수위가 장난 아니다. 첫 회부터 국정원 직원들이 내부고발자를 고문해 죽이고는 차안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로 위장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온다. 다음 주에는 “거긴 업무상 비밀이라고 하면 끝이다. 영수증 하나 없이 국민 세금 4천억 원씩 팍팍 써도 국회에서도 못 따진다. 직원이 빨간 차에서 죽든, 댓글 달다가 셀프 감금하든…” 이란 대사가 날아든다. 국정원 직원의 빨간 마티즈 변사 사건, 4000억원이 넘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국정원 직원 셀프 감금 사건 등 실화를 그대로 녹인 대사이다.

그뿐이 아니다. 미래경제연구소장이 된 전직대통령 이광호(전국환)가 검찰에 소환되자, 군복차림에 태극기를 흔드는 지지자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익숙한 광경이다. ‘이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자신이 전 재산을 기부해 장학금을 줄 만큼 물욕이 없다고 말한다. 검사는 “정확히는 재단을 만드셨죠. 그만큼 세금도 적게 내고”라며 받아치고는, 국정원 특수활동비로 비자금을 만든 과정을 풀어낸다.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일부를 마카오에 있는 회사에 송금하고, 국정원장이 홍콩에 갈 때마다 혼자 마카오로 건너가 해당 회사의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한 뒤, 국정원 외교행낭을 통해 국내로 반입했다는 것. 최순실 자매가 외교행낭을 이용해 비자금을 반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현금으로 청와대에 상납되었음이 밝혀진 지금, 귀에 쏙쏙 박히는 대사들이다.

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광호는 5년 전 퇴임하였고, 얼마 전 정권이 바뀌어 “국정원이 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바짝 엎드려” 있단다. 그 사이에 전직 대통령이 한 명 더 있다는 뜻이다. 국정원장에서 퇴임한 국수란(윤유선)이 심복들과 함께 식품회사로 자리를 옮긴다. 세금으로 운영되며 국정원이 직접 하기 힘든 일들을 처리하는 국정원의 외곽조직이다. 국정원 퇴직자 모임인 양지회와 자회사인 양지공사 등이 떠오르는 와중에, 국수란이 이광호를 찾아와 식품회사 인력을 줄이지 말라고 간청한다. 5년 전에 퇴임한 이광호가 지금껏 국정원장을 수하로 부리고 있었으며, 국정원 외곽조직의 인력까지 관장할 만큼 지배력이 있다고?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5년 전에 취임한 전직대통령은 이광호가 만든 꼭두각시였음을 암시한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국정원을 비롯해 군 사이버 사령부, 국가보훈처 등을 동원하여 2012년 대선에 개입해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사실을 그대로 빗댄 것이다. 드라마에는 3년간 댓글만 달아 첩보업무에 무능한 국정원 직원이 언급되기도 한다.

이처럼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드라마의 분위기는 사뭇 밝다. 느와르가 아닌 코믹액션물에 가까운데, 이런 분위기에 가장 일조하는 것이 주인공 캐릭터다. 그는 상당한 능력자지만, 가끔 짓는 어벙한 표정이 말해주듯 빈틈이 많은 인물이다. 여기서 윤균상의 캐스팅이 중요하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문화방송·2017년 5월 종영)에서 맡았던 홍길동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치기 때문이다. 사실 ‘천억 원의 비자금을 쫓는 사형수’라는 설정자체가 현대판 ‘의적’과 유사성을 지닌다.

그는 이중적인 존재이다. 절도범이었던 소년 김종삼은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주를 포기할 만큼 휴머니스트다. 그는 강형사(장현성)에 의해 경찰 정보원으로 훈련받고 경찰시험에도 합격한다. 하지만 살인자의 누명을 쓴 채 사형수가 되고, 복역한지 십년 만에 감방동기의 범죄를 막기 위해 탈옥한다. 이후 경찰 오일승의 신분으로 살며, 이광호의 잃어버린 비자금을 찾는다. 요컨대 범죄자이자 경찰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이 그를 겹겹이 싸고 있다. 경찰 오일승이라는 가짜 신분을 벗기면 사형수 김종삼이 나오고, 한 겹을 더 벗기면 누명을 쓴 경찰 지망생이 나온다. 한 겹을 더 벗기면 절도범이 나오지만 그의 내면은 정의롭다는 식이다. 그는 이광호의 감시 안에 놓여 있지만, 언제 그의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십년 만에 나타난 강형사와 힘을 합쳐 이광호의 죄를 까발리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를 응원하며 보게 된다.

드라마에는 ‘적폐청산’을 국론분열로 치부하는 경찰간부가 등장한다. 적폐청산 수사를 올해 마무리 하겠다는 검찰총장의 발언이 연상된다. 한편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옵션열기’이다. 국정원 댓글부대에 대한 수사가 한차례 마무리 되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옵션열기’라는 흔적을 남기며 활동하는 잔당들의 존재가 암시된다. 그들 뒤에 누가 있는 걸까. 이쯤 되니 무엇이 드라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고사된 뒤, 지금의 역사를 다루는 ‘실시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드라마가 출현한 것으로 봐야 할까. 혹시 이명박은 이 드라마를 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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