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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02 19:17 수정 : 2016.03.03 09:27

야당의 무제한 토론으로 정치혐오의 안개가 걷혔다. 민주주의는 그 매력적인 얼굴을 잠시 드러냈다. 그러나 열흘 만에 여의도는 다시 안개에 파묻혔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머리 숙여 사죄했지만 지지자의 허탈감을 달래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제 결산의 시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저놈은 미쳤다. 절대로 먼저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피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 패자의 독백이다.

“저놈은 마음이 약하다. 내가 끝까지 버티면 겁을 먹고 먼저 피할 것이다.” 승자의 독백이다.

이번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겼다. 4·13 선거 일정을 통째로 걸고 벌인 테러방지법 협상과 무제한 토론은 대통령과 야당의 치킨게임이었다. 치킨게임에 접어드는 순간 대통령의 승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책상을 열 번 쳤다. 새누리당은 ‘주호영 수정안’에서 한 자도 못 고친다고 버텼다.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출구전략을 짰다. 경제 실패를 쟁점화하기 위해 안보 정국을 끝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치킨’이 됐고 ‘박근혜 필승’ 신화는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한 뒤 정면승부에서 패한 적이 거의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았고 사학법을 재개정했다. 세종시 수정안을 좌절시켰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담이 더 커졌다. 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몰아 내쫓았다. 김무성 대표를 사사건건 구박해 거의 바보로 만들었다. 툭하면 국회와 야당을 심판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 직분을 외면하고 거리 서명을 선동했다. 3·1절 기념식에서 여야 대표를 앞에 놓고 국회가 직무유기를 한다고 비난했다. 자신이 앞장서서 만든 국회법이 무제한 토론을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끗이 잊은 것 같다. 참 편리하다. 하긴 그렇게 해도 선거는 연전연승이다. 임기 중반이 훨씬 지났는데 여론조사에서 정권심판론과 야당심판론이 엇비슷하게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국내 정치에서의 연승이 자신감을 길러주었을 것이다. 지난해 휴전선 목함지뢰 폭발 사건과 북한의 포격에 박근혜 대통령은 대북 확성기 방송과 국지전 불사라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무박 4일의 남북 고위급 접촉과 8·25 합의는 대외관계도 치킨게임으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심어준 것 같다. 올해 들어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에 대해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와 개성공단 폐쇄라는 불가역적 조처로 맞선 배경을 이런 맥락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정말 북한 핵 문제를 푸는 데 치킨게임이 통할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 핵은 남북한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당사자다. 둘이 마주 보고 달리는 치킨게임이 성립할 수 없다. 둘째, 북한은 벼랑끝 전술과 치킨게임의 최고수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 제1비서를 거의 모른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사드 배치와 개성공단 폐쇄를 지지하는 여론이 꽤 높다. 국민들은 안보 위기 국면에 일시적으로 우리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고 있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대가를 온 국민이 처절하게 치를 수 있다. 이미 그런 조짐이 시작됐다. 미국은 사드 배치를 우리나라를 제치고 중국과 협의하고 있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국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운이 언제까지 갈까. 치킨게임의 특징은 영원히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미친놈을 만나면 둘 다 죽는다.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도 조심해야 한다. 중국 권법에 비유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외가권인 소림권법이다. 힘이 밖으로 드러난다. 김무성 대표는 내가권인 무당파의 태극권에 가깝다. 상대의 직선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고 끝없이 휘감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극권이 유리하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강호에서 보지 못하던 권법을 사용한다. 필살기가 있을 수 있다. 고수들은 특히 경계해야 한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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