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7 15:38
수정 : 2019.06.2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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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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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심리상담실이 위험하다
정서적 의존성 이용해 내담자와 성관계 맺은 심리상담사
“내담자에 대한 정신적 손해 배상 의무 있어” 판결
형사선 ‘무죄’ 민사선 ‘불법행위’ 인정
“심리적 위계관계 인정하고 성폭력으로 봐야”
미국에선 상담사-내담자 성관계 ‘중범죄’로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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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사가 내담자의 정신적인 취약함을 이용해 성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내담자에 대한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북부지법은 지난 12일 내담자 ㄱ씨가 상담사에게 갖게된 강한 정서적 의존성을 이용해 수 차례에 걸쳐 성관계를 맺은 심리클리닉 대표 ㅁ씨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며 1500만원을 손해배상하라는 1심 판단을 유지했다. 1심에 대한 ㅁ씨쪽 항소를 기각한 것이다.
서울북부지법은 “심리상담사인 ㅁ씨( 내담자의 전이된 감정을 내담자의 심리치료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야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내담자가 애정을 보이더라도 (상담사는) 진정한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며 “ㅁ씨는 (이런) 상담가의 역할과 의무를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 대한 (내담자의) 강한 의존상태와 전이된 감정을 이용해 성관계를 맺었다”고 봤다. 이에 따라 “ㅁ씨는 내담자에 대한 계약상의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이고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내담자에게 정신적 손해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이감정’은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억압된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해 재현하는 무의식적인 행위다. 전이상태에선 성적인 감정을 포함해 분노, 증오, 불신, 극도의 의존성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신과 같은 존재, 영적인 스승으로 인식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승욱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는 “‘전이감정’은 상담치료나 정신분석 분야, 목사와 신자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상담사는 치료과정에서 이런 전이감정에 대해 설명하고 내담자가 현실을 직시하게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상담사의 불법행위를 인정한 이번 판결은 환자나 내담자에 대한 의사와 심리상담사의 계약상 보호의무를 보다 넓게 해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사건을 담당한 임주환 변호사는 “그동안은 의사나 심리상담사의 보호의무를 ‘설명을 제공할 의무’ 정도로만 좁게 해석했는데 이번 판결에선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환경에서 치료를 하면서 내담자의 생명, 신체에 대한 손해를 가해서는 안 될 보호의무’로 (좀 더 넓게) 해석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내담자 ㄱ씨는 ㅁ씨와의 성관계 이후 죄책감, 수치심, 정서적 혼란 등으로 고통을 겪었고 공황 발작 증세를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앞선 형사 재판에선 성범죄로 인정받지 못했다. ㄱ씨는 2016년 ㅁ씨를 준강간, 감금,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등으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준강간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했다. 형법 제299조는 준강간을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한 간음 또는 추행’으로 보고 있는데, 법원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거나 정신기능 이상인 경우가 아닌 다른 이유를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로 보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대신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에 대해서만 ㅁ씨를 기소했다. ㄱ씨에게 “(성관계를) 너무 하고 싶어요”라는 문자를 전송하고 다른 내담자와의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한 뒤 이를 ㄱ씨에게 보여줘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 혐의다. 하지만 법원은 2심에서 이를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이는 심리상담실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 현행법상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심리상담은 대부분 상담사와 내담자 단 둘이 있는 환경에서 이뤄지는데다 상담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성폭력에 더욱 취약하다. 이 대표는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 ‘전이’에 의한 심리적 위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법원에서) 성폭력으로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며 “내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 사이에서 발생한 성관계는 무조건 성폭력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20개가 넘는 주에서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의 성관계를 중범죄로 본다. 일례로 미네소타주의 경우 “심리치료 과정에서 심리치료사가 환자 또는 환자였던 자를 간음한 경우 피해자의 동의는 방어사유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선 상담사가 속한 학회에 제소하는 것 외엔 마땅한 제재조치가 없다. 한국심리학회는 정관에 “심리학자는 치료적 관계에서 내담자·환자와 어떤 성적 관계도 허용되지 않는다. 심리학자는 치료 종결 후 적어도 3년 동안 자신이 치료했던 내담자·환자와 성적 친밀성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학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상담 활동에는 제약이 거의 없어 학회원 자격박탈은 제재 효과가 없다.
상담 자격이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지 않는 것도 고질적인 문제로 꼽힌다. 국내의 상담 관련 민간자격증은 3000개에 달하는데 지역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 등에서 10시간 정도의 상담기본교육을 제공하고 자격증을 남발하는 현실이다. 이 대표는 “내담자 성폭력 혐의로 소송에 걸리거나 학회에서 제명돼도 일정 기간 조용히 지내다가 다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며 “자격증이 난무하는데다 이를 재취득하는데 아무런 제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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