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 다음 카페 여성 단체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2차 규탄 시위' 모습.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여성이 겪는 일상적 차별 간접체험 했다”
‘생물학적 남성’은 폴리스라인 밖 취재만 가능
주최쪽 “취재 일부제한”과 무려 2만명의 외침 사이…
응답하지 않으면 더 커질 목소리란 점만은 분명하다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 다음 카페 여성 단체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2차 규탄 시위' 모습.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지난 9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주변은 인기 아이돌 그룹의 대규모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여성 2만2000여명(주최 쪽 추산·경찰 추산 1만5000여명)이 인터넷 카페 ‘불편한 용기’에서 주최한 ‘불법촬영 편파수사 2차 규탄 시위’에 참가해 “(몰카 사건 피의자) 구속수사 엄중처벌 촉구한다”, “남초커뮤(니티) 유포몰카 삭제하라” 등의 구호를 힘껏 외쳤기 때문입니다. 가변 좌석을 설치할 경우 최대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척 스카이돔을 통째로 혜화역에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관련 기사 :“내 일상은 네 포르노 아니다” 2만2천 여성 모였다)
언론사 입장에서 이날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는 이른바 “얘기가 되는”(기사화할 만큼 중요하고 사회적 의미가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지난달 19일 열린 1차 시위(주최 쪽 추산 1만2000여명, 경찰 추산 1만여명)에 견줘 참가 인원이 두배 가량 늘었고, ‘항의’의 뜻으로 붉은 옷이나 모자를 쓴 여성들이 혜화역 1번 출구에서부터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까지 800m나 되는 거리를 가득 메운 모습도 놀라운 광경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날 집회는 다른 현장과 견주어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습니다. 주최 쪽에서 ‘생물학적 남성’인 기자들의 취재를 일부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남성 기자들은 경찰이 2중으로 설치한 폴리스라인 밖에서만 취재와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집회를 시작할 때와 여섯 명의 여성이 삭발식을 할 때, 주최 쪽은 취재진에 무대 정면에서 참가자들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요. 이때 촬영 기회는 ‘생물학적 여성’ 기자들에게만 허용됐습니다. “생물학적 여성만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주최 쪽의 방침 때문이었습니다.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남성 기자들은 ‘멘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특히 ‘(영상) 그림’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방송사 남성 기자들은 더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전에 주최 쪽 보도 가이드라인을 파악한 몇몇 매체의 경우 여성 기자와 남성 기자가 함께 현장 취재를 나오기도 했는데요. 한 방송사는 카메라 촬영기자 2명 모두 여성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송사의 마이크를 잡은 취재 기자는 남성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을 미처 알지 못해 혼자 취재를 온 남성 기자들만 ‘울상’이 됐습니다. ㄱ 방송사 소속 남성 기자 ㅂ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실까요?
“오늘 집회는 방송사 입장에서 정말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은 현장인데 남성 기자는 무대 앞쪽에서 촬영할 수 없다고 하니까 아쉽죠. 회사에 여성 촬영 선배가 계시긴 한데 오늘 휴무라 못 나오셨고... 아까 여성 기자들이 촬영하러 무대 앞에 나갔을 때 참가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데 (촬영 기회를 얻은 게) 부럽더라고요. 그래도 주최 쪽 입장을 이해하니까 뭐 어쩌겠어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 다음 카페 여성 단체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2차 규탄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의미로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사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폴리스라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여성 기자들 역시 사진 촬영 이외의 취재에선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집회 참가자나 스태프에게 개별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도 일절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집회에 참가한 여성들에게 ‘왜 집회에 나오게 됐는지’, ‘경찰의 불법촬영 수사가 왜 성별에 따라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지’ 등을 직접 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기자들은 이날의 취재 여건이 무척 어려웠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여성 기자들에게만 근접 촬영의 기회를 준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집회 참가자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폴리스라인을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마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었지만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고위직에 올라가기 어려운 구조를 뜻하는 ‘유리천장’ 개념이, 혜화역 시위에선 되레 남성 기자들에게 폴리스라인이라는 물리적인 벽으로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물론 시위를 주최한 ‘불편한 용기’의 결정이 처음부터 남성 기자들에게 ‘유리천장’ 개념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큰 그림’에 의해 기획된 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이날의 경험을 통해 남성 기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인 차별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이유로 집회 취재에 제약을 받은 것이 일종의 ‘미러링’(타인의 행동을 거울에 비춰 똑같이 따라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남성 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시죠.
“홍대 몰카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로서 몰카 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입장에 공감하는 편이에요. 또 생물학적 남성을 (폴리스라인 안에) 못 들어오게 함으로써 집회의 선명성을 높이려는 의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요. 그런데 혜화역 시위를 취재하며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이유로 (막상 취재에서) 배제가 되니까 남성인 제가 ‘미러링’을 당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나는 여성들의 의견에 공감하는 기자이고,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 생물학적으로 특정 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없게 된 건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주최 쪽이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남성 기자들의 취재를 제한했다면 이번 시위의 취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꽤 유효한 전략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합니다. 기자로선 당연히 아쉽죠. 여성 기자가 취재를 나온 매체보다 디테일한 사실이나 사진을 확보할 수 있는 경쟁에서 밀리게 되니까요.” -<한국일보> 이상무 기자-
“사실 취재를 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접근에 제약이 생기니까 아무래도 아쉽죠. 남성 개인으로는 주최 쪽 결정이 이해가 되기도 해요. 남성 기자가 젠더 이슈에 대해서 기사를 쓸 때 여성 입장에선 불신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생물학적 남성들은 불법촬영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성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겠죠. 어떤 남성 기자가 여성들의 문제 제기에 반발심을 갖고 취재한다면 집회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 기사를 쓸 수도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집회에 참가한 여성들은 남성 기자에 대한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남성 기자가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여성 입장에선 그 기자가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혜화역 현장에선 일종의 ‘미러링’이었다고 해야 하나? 남성인 제가 사회적 소수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저한텐 교육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취재 현장에서 일종의 ‘여성되기’를 체험한 거죠.” -<한겨레> 임재우 기자-
하지만 여성 기자 입장에서도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불법촬영 사건의 대다수 피의자가 남성이고 그런 이유로 생물학적 남성의 참여를 배제한 주최 쪽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집회라는 것은 결국 “길거리에 나온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실천적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불법촬영 사건 수사 기관을 비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보다 많은 매체와 기자를 통해 알려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남성 기자의 취재를 일부 제한하는 주최 쪽의 결정이 과연 2만2000여명이나 되는 시민이 혜화역에 모인 집회의 취지와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지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날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국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지 않으면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길을 걸을 때, 화장실 갈 때, 생활할 때 두려움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삭발식에 참여한 한 여성이 외친 사회는 언제쯤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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