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3 18:00
수정 : 2019.12.04 14:32
전우용 ㅣ 역사학자
“우리 조선인은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쓰는데, 서양인들은 제 이름을 앞에 쓰고 성을 뒤에 쓴다. 자기를 앞세우고 조상을 뒤로 돌리는 것을 보면 저들이 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구미인은 실내에 들어갈 때 신발은 신은 채 모자를 벗는데, 조선인들은 거꾸로 모자를 쓴 채 신발을 벗는다. 문틀이 낮은데도 모자가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한국인들은 구미인을 처음 접했을 때 조상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 자기들과 정반대라고 느꼈고, 구미인들은 한국인을 처음 대했을 때 많은 행동거지가 자기들과 정반대인 점을 흥미롭게 여겼다. 구미인들은 특히 실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할 때마다 신발을 벗었다 신어야 하는 데에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한국의 주택은 사람이 서는 곳과 앉는 곳과 눕는 곳을 구별하지 않았기에, 실내 구석구석이 늘 청결해야 했다. 신발을 신은 채로 실내에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난입(亂入)이었다. 한국 주택에서 실내와 실외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신발을 벗어놓는 댓돌이었다.
한국인들이 슬리퍼(slipper)라는 뒤축 없는 신발을 실내화로 신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 이후였다. 1920년께부터 요릿집들에서는 고객들에게 슬리퍼라는 이름의 신발을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 신발은 현관에서 방 사이, 또는 방에서 측간 사이를 왕래할 때에만 신어야 했다. 요릿집이라 해도 슬리퍼를 신은 채 방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슬리퍼는 삼실(마사, 麻絲)이나 왕골로 짠 것으로서, 1921년의 경우 조선 내 생산액이 10만원,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 19만원어치였다. 켤레당 가격은 50전 내외였으니 매년 60만켤레 정도가 사용된 셈이다. 1922년께부터는 고무신 공장들이 슬리퍼 생산을 시작해 급속히 시장을 확대했다.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운동화 모양의 실내화를 신도록 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는데, 그런 경험 때문인지 현대의 많은 직장인이 사무실에서는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한 이후에는 방 안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도 많고, 고객에게 실내에 들어올 땐 슬리퍼로 갈아 신으라고 요구하는 상업시설도 많다. 현대인들은 실내뿐 아니라 실외에서도 자주 슬리퍼를 신는다. 슬리퍼는 한국인의 행동거지를 바꿔놓는 데 큰 구실을 한 물건이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