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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2 17:52 수정 : 2019.10.23 02:07

전우용

역사학자

한국 정치인들은 선거철이면 재래시장에 가서 떡볶이나 순대를 사 먹으며 상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한다. 한국 방송사들은 때때로 재래시장에 가서 “사상 최악의 불경기”라며 분노하거나 낙담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찍어 내보내곤 한다. 현대 한국의 재래시장은 민심의 척도이자 경기의 바로미터 구실을 해왔다. ‘재래’란 ‘옛날에 생겨 지금까지 전해온’이라는 뜻이다. 재래시장은 언제 처음 생겨 지금에 이른 것일까?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을 시(市), 행상이 모여들어 교역하고 물러나는 곳을 장(場)이라 했다. 조선 왕조가 서울에 도읍한 직후 종로와 남대문로에 시전 거리가 만들어졌고, 18세기에는 남대문 밖 칠패(七牌)와 동대문 안 배오개에 새벽 장이 섰다. 시전에서는 주로 포목, 종이, 건어물 등 쉬 부패하지 않는 물건을 취급했고, 칠패와 배오개에서는 주로 채소, 과일, 생선 등 부패하기 쉬운 식료품을 취급했다. 칠패와 배오개에는 행상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떼어서는 지게에 싣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팔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세를 화폐로 걷게 되자, 현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의 쓸모가 사라졌다. 서울에서 가장 큰 창고이던 남대문 옆 선혜청 창고가 비었다. 1897년 1월, 정부는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상점으로 내주고, 창고 안마당은 행상들의 장사 터로 삼았다. 정부는 이곳에서 곳간세와 행상세를 거두는 대신 관리인을 파견하여 청결과 방화, 방범 등을 맡겼다. 이로써 최초의 근대적 도시 상설시장, 즉 ‘재래시장’이 생겼다.

선혜청 창고는 옛 상평창 자리에 새로 만든 것이어서 신창(新倉)이라고도 했기 때문에 이 시장은 ‘신창 안 장’ 또는 ‘창내장’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이 현재의 남대문시장이다. 1905년에는 민간 상인들이 청계천 광교에서 장교 사이 구간을 복개하여 새 시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광교와 장교의 앞글자를 따 ‘광장시장’이라고 이름부터 붙였으나 복개가 쉽지 않아 배오개로 옮기고 ‘장’의 한자를 長에서 藏으로 바꿨다. 동대문시장은 여기에서 시작했다.

재래시장이 처음 생긴 지 이제 120여년, 가상 공간에 시장이 생긴 지도 30년 정도 되었다. 재래시장은 언제까지 서민 생활을 상징하는 장소 구실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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