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유교의 오륜 중 하나인 부부유별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활동 공간 또는 노동 공간을 구별하라는 것이었다. 남성의 일터는 집 밖, 여성의 일터는 집 안이었다. 남성은 농사꾼이든 사냥꾼이든 어부든 대장장이든 장사꾼이든 아침에 집 밖으로 나가 일하다가 날이 저물 때 귀가했고, 여성은 집 안에서 밥 짓기, 설거지하기, 아이 보기, 실잣기, 베 짜기, 바느질하기, 다듬이질하기 등으로 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여성에게 허용된 바깥일은 물 긷기, 빨래하기, 새참 나르기 정도였다. 모내기나 추수 때 부득이 들일을 거드는 경우도 있었으나, 연중 며칠뿐이었다. 개항 이후 기계 생산 면포와 면사가 수입되자 여성들의 집안일에 변화가 생겼다. 한동안은 외국산 면사를 이용한 가내 직포업이 확대됐으나, 가격 경쟁력에서 기계 생산 면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농촌 가정에서 딸을 ‘군입’ 취급하는 문화가 확산했고, 딸들은 집안일을 거드는 대신 도시의 공장과 상점, 술집, 부잣집 등에 취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을 떠난 여성들의 일터도 거의가 집(건물) 안이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전선(戰線)이 계속 길어지는 상황을 자초했다. 길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군인 수도 계속 늘려야 했다. 노동력이 있는 일본인 남성은 거의 모두 군대에 끌려갔다. 일본인 남성이 남기고 간 일자리는 조선인 남성이 채웠다. 조선인 남성의 자리를 채울 사람은 조선인 여성밖에 없었다. 1930년대 초중반부터 들에 나가는 농촌 여성이 늘어났다. 1941년 봄, 여성의 일상복을 몸뻬로 통일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몸뻬란 허리와 발목에 고무줄을 넣고 펑퍼짐하게 만든 일본식 여성용 바지를 말한다. 뒤이어 여학교들이 몸뻬 교복을 채택했고, 1944년에는 몸뻬를 입지 않은 여성의 관공서 출입과 대중교통 수단 이용이 금지되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 여성 절대다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몸뻬를 치마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들은 다시 몸뻬 착용을 강요받았다. 지금도 많은 농촌 여성이 몸뻬를 노동복으로 착용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유물인 몸뻬는, 한국 여성을 집 밖으로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물건이기도 하다.
칼럼 |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몸뻬 |
역사학자 유교의 오륜 중 하나인 부부유별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활동 공간 또는 노동 공간을 구별하라는 것이었다. 남성의 일터는 집 밖, 여성의 일터는 집 안이었다. 남성은 농사꾼이든 사냥꾼이든 어부든 대장장이든 장사꾼이든 아침에 집 밖으로 나가 일하다가 날이 저물 때 귀가했고, 여성은 집 안에서 밥 짓기, 설거지하기, 아이 보기, 실잣기, 베 짜기, 바느질하기, 다듬이질하기 등으로 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여성에게 허용된 바깥일은 물 긷기, 빨래하기, 새참 나르기 정도였다. 모내기나 추수 때 부득이 들일을 거드는 경우도 있었으나, 연중 며칠뿐이었다. 개항 이후 기계 생산 면포와 면사가 수입되자 여성들의 집안일에 변화가 생겼다. 한동안은 외국산 면사를 이용한 가내 직포업이 확대됐으나, 가격 경쟁력에서 기계 생산 면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농촌 가정에서 딸을 ‘군입’ 취급하는 문화가 확산했고, 딸들은 집안일을 거드는 대신 도시의 공장과 상점, 술집, 부잣집 등에 취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을 떠난 여성들의 일터도 거의가 집(건물) 안이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전선(戰線)이 계속 길어지는 상황을 자초했다. 길어지는 전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군인 수도 계속 늘려야 했다. 노동력이 있는 일본인 남성은 거의 모두 군대에 끌려갔다. 일본인 남성이 남기고 간 일자리는 조선인 남성이 채웠다. 조선인 남성의 자리를 채울 사람은 조선인 여성밖에 없었다. 1930년대 초중반부터 들에 나가는 농촌 여성이 늘어났다. 1941년 봄, 여성의 일상복을 몸뻬로 통일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몸뻬란 허리와 발목에 고무줄을 넣고 펑퍼짐하게 만든 일본식 여성용 바지를 말한다. 뒤이어 여학교들이 몸뻬 교복을 채택했고, 1944년에는 몸뻬를 입지 않은 여성의 관공서 출입과 대중교통 수단 이용이 금지되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을 때, 한국 여성 절대다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몸뻬를 치마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성들은 다시 몸뻬 착용을 강요받았다. 지금도 많은 농촌 여성이 몸뻬를 노동복으로 착용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유물인 몸뻬는, 한국 여성을 집 밖으로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물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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