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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5 17:47 수정 : 2019.06.26 09:46

전우용
역사학자

세종 9년(1427) 5월, 악학별좌(樂學別坐) 박연이 나무틀에 12개의 경석(磬石)을 매단 악기인 편경을 새로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돌은 금속에 비해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는 편경 소리를 기준으로 다른 악기들을 조율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경을 만들기에 적합한 돌을 구하지 못해 오랫동안 쇳덩어리를 경석 대신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날씨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박연이 화성에서 발견된 경석으로 편경을 만든 뒤에야 비로소 절대음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사물의 크기나 두께의 미세한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은 눈보다 귀가 뛰어나다. 도자기에 미세한 금이 생겼는지 여부는 눈이 아니라 귀로 판별한다. 미세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기계가 악기다. 그래서 기계 생산 시대 이전에는 악기 제조업이 최고의 정밀공업이었다. 황종율관이라는 일종의 피리로 도량형의 기준을 삼은 것도 그 정밀성 때문이다. 물론 서민들이 축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악기도 많았지만, 모두 조악해서 귀족들을 위한 연주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값이 싼데다 연주법을 익히기도 쉬워 악기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현대 대중음악의 기본 악기로 자리잡은 것이 기타다. 줄 하나를 막대기 양쪽 끝에 묶은 활을 기타의 원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다른 현악기와 구별되는 기타의 고유성이 확정된 것은 9세기의 일이다. 무어인들이 이슬람권의 악기를 스페인에 가져갔고, 스페인인들은 이를 변형해 자기네 민속 악기로 만들었다. 기타는 14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16세기에는 스페인 함대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 기타가 전래된 것은 1920년대 초였는데, 홍난파에 따르면 한동안 ‘유행가 반주용 저급 악기’로 취급받았다. 기타 연주자가 대극장 무대에 선 것은 1940년 겨울의 정세원이 처음이었다. 유럽 68혁명의 여파를 타고 장발, 미니스커트, 청바지 등이 유행할 때, 기타도 청년 문화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얼마 전 홍콩 시민들이 시위 도중 기타 반주에 맞춰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노래 가사는 인류의 지향이 다를 수 없음을 보여줬고, 기타의 선율은 세계인의 음감이 통합되었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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