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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28 17:29 수정 : 2019.05.28 19:02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

1884년 12월 우정국 낙성식에 참석했던 왕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동석했던 통리아문 협판 묄렌도르프는 그를 자기 집으로 옮기고 조선인 의사들을 불렀다. 그러나 한의학에는 칼 맞은 상처를 치료할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다급해진 묄렌도르프는 그 얼마 전 서울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을 떠올렸다. 급히 달려온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했다. 그 덕에 민영익이 살아나자 고종은 알렌을 불러 치하했다. 그 자리에서 알렌은 왕이 ‘호스피털’(hospital)을 하나 지어주면 자기가 무료로 시무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통역이 ‘호스피털’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듬해 4월 의정부는 “혜민서와 활인서를 이미 혁파했는데 이는 조정에서 구휼하는 본의로 볼 때 큰 결함이 됩니다. 별도로 원(院) 하나를 설치하여 광혜원이라고 이름 붙이고 외아문에서 전적으로 관할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고, 고종은 즉시 윤허했다. 그 얼마 뒤 조선 정부는 조서(詔書)에서 광혜원 세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제중원이라 쓴 쪽지를 덧붙였다. 이로써 행정적으로는 이 시설에 광혜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다. 여행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다른 정부기관 광혜원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승정원, 사간원, 사옹원, 이태원 등 원 자를 쓴 관서들은 숙식 등의 생활 시설이 완비된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숙식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시설을 의원(醫院)이라고 부른 지는 아주 오래되었으나, 병자가 숙식하면서 치료받는 시설이라는 의미의 병원(病院)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1899년 ‘병원관제’ 제정 이후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 의료체계를 수용한 일본은 관행적으로 군용 의료기관에 병원, 민간 의료기관에 의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관행은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현재는 병상 수 30개 이상을 병원, 그 이하를 의원으로 나누지만, 일상 용어로는 병원으로 통칭된다. 병원이라는 이름이 생긴 지 120년, 이제 사람의 일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병원 신생아실에서 병원 장례식장까지’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생로병사의 모든 계기에 신전과 사원을 찾았으나, 현대인들은 병원을 찾는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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