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06 17:56
수정 : 2019.03.07 09:21
전우용
역사학자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오랫동안 애창된 아이들 노래 가사 일부다. 바나나는 맛있는 과일을 넘어 맛있는 음식의 대표 격이었다. 필자가 어릴 적에는 바나나를 손에 쥔 친구가 있으면 그 주변에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들곤 했다. 그 무렵의 초등학생들은 바나나 하나만으로도 신분 상승을 체감할 수 있었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온갖 아첨을 다 한 끝에 손톱만한 조각이라도 얻어먹는 것도, 일기에 쓸 만큼 큰일이었다.
바나나의 원산지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열대 우림 지대이다. 바나나는 콜럼버스가 유럽∼아메리카 항로를 발견하기 전에 아프리카에 전파되었고, 유럽인들은 이를 아메리카에 이식했다. 일본 규슈 지역에 전파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나나는 유전적 다양성이 없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미국의 식품 자본은 그로 미셸(Gros Michel)이라는 단일 품종을 재배 가능한 모든 지역에 퍼뜨렸다. 1950년, 바나나의 흑사병으로도 불린 ‘파나마병’이 유행해 10여년 만에 그로 미셸 품종을 전멸시켰다. 절망에 빠진 바나나 농장주와 농민들을 구한 것은 캐번디시(Cavendish)라는 품종이었다. 맛은 그로 미셸만 못하지만 병에 대한 저항력은 강했다. 필자가 어렸을 때 먹은 바나나와 요즘 바나나 맛이 다른 이유가 기분 탓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많은 식물학자가 머지않아 이 품종도 멸종되리라고 예측한다.
우리나라에 바나나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20년대 중반께로 추정된다. 1927년 바나나 이입량은 138만㎏, 36만8천관이었으며 한관의 가격은 80전이었으니 총 29만4400원어치였다. 그 무렵 막일꾼의 하루 노임이 1원을 조금 넘었고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50원 정도였다. 바나나는 대다수가 일본인인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특권적 과일이었다. 먹어보지 못하고 얼마나 황홀한 맛인지에 대해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귀하디귀하던 바나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흔해졌는데, 세간에는 권력형 비리 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현대 한국인에게 바나나는 이국의 맛을 느끼게 해준 특별한 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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