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06 17:47
수정 : 2019.02.07 09:31
전우용
역사학자
인류가 흙으로 빚은 그릇과 나무껍질로 엮은 그릇 중 어느 것을 먼저 만들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저장과 운반을 위한 도구의 발명 덕에 인류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 농경의 시작과 그릇 발명은 인류를 예측하고 계획하며 준비하는 동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껍질로 엮은 그릇을 형태와 용도에 따라 광주리, 소쿠리, 바구니 등으로 구분했다. 바닥이 넓고 평평한 그릇이 광주리인데, 주로 새참을 나르거나 다량의 채소 등을 보관하는 데 썼다. 바닥이 오목하고 입구 부위에 테를 두른 그릇이 소쿠리인데, 소량의 채소나 과일을 씻어 담아 두었다가 옮기는 데에 썼다. 소쿠리보다 깊고 입구에 테를 두르지 않은 그릇이 바구니로, 나물 캐러 갈 때나 작은 물건들을 담아 운반할 때 썼다. 반찬거리 등을 사러 시장에 갈 때도 바구니를 지참했다.
19세기 초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 “오늘날 서울의 시장에서 오가는 이들은 타원형의 바구니를 지녔는데 생선이나 채소를 여기에 담는다. 여자들은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남자들은 새끼줄을 달아 들고 다닌다. 한강 북쪽에서는 대가 나지 않아 싸리 껍질을 벗겨 짜 만든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른바 ‘양가의 여자’들이 바구니를 들고 장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장보기는 남자의 일이었고, 비녀(婢女)들이 대신하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100여년 전에도 ‘양가의 여자’들은 하인을 시키지 말고 직접 장을 보라는 권유를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기로 어떻게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가게나 장거리에서 고기나 콩나물을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들딸 혼인도 못 시키게”라고 대답하곤 했다.
신분제가 해체되어 노비를 부릴 수 없게 되고 도시 남자들이 집 밖의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 상태로 내몰린데다가 경제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장바구니는 ‘여성용 운반 도구’가 되었다. 이제 장바구니는 이름만 남고 실체는 사실상 사라진 물건이다. 언론에서는 아직도 ‘장바구니 물가’라는 말을 쓰지만, 일상에서는 쇼핑백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 물건이 현대 여성을 ‘가정 경제의 주체’로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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