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06 18:44
수정 : 2014.10.06 18:44
“청노새 안장 위에 실어 주던 엽전 열닷냥.” 시골 선비댁 아낙은 왜 돈을 지갑이나 가방에 넣어 주지 않고 노새 안장 위에 실어 주었을까? 답은 ‘가방이 없어서’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건을 휴대하여 운반할 때에는 지게, 자루, 보자기, 쌈지 등을 사용했다. 휴대하는 물건의 가짓수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여행이 드물었기에, 여러 개의 수납공간을 가진 개인 여행용 운반 도구를 따로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지 유신 직후의 어느 날, 마차를 타고 도쿄 시내를 지나던 일본 왕은 길가 상점 앞에 가방(かばん)이라 쓰인 천이 내걸린 것을 보았다. 왕은 시종에게 가방이 뭔지 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재빨리 달려갔다 온 시종은 서양식 가죽 포대라고 보고했다. <도쿄 이야기>를 쓴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아마도 상점 주인이 네덜란드어 카바스를 가방으로 잘못 썼을 것이라 추정했다. 하지만 이 말이 카바스를 잘못 쓴 것이든, 중국어 ‘挾板’을 캬반으로 옮겨 쓴 것이든, 당시 일본인들은 일단 왕이 가방으로 기억한 이상 그 물건에 가방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신민(臣民)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죽이나 두껍고 질긴 천으로 만든 개인용 운반용구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가방이라는 단어와 함께였다. 그런데 이 물건이 전파되는 속도는 사뭇 더뎠다. 값이 비쌌을뿐더러 귀인(貴人)은 손에 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문화적 저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해방 무렵까지는 여러 물건을 상시 휴대해야 하는 학생들조차 책가방이 아니라 책보를 썼다. 이런 문화적 저항을 분쇄한 것은 귀중품과 상시 휴대하는 증서(證書)의 증가였다.
현대인들은 유치원에 갈 때부터 가방을 휴대하기 시작해서 일하는 평생 가방을 들고 메고 끌고 다닌다. 특히 집 밖으로 나선 여성들에게 가방은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방이 사람을 닮은 것인지 사람이 가방을 닮은 것인지, 요즘 어지간한 가방은 그 안에 든 내용물들보다 훨씬 귀한 대접을 받는다. 속보다 겉을 중시하는 시대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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