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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1 18:51 수정 : 2014.09.01 18:51

“부위독급래.” 집집마다 전화기가 놓이기 전에는, 이런 암호 같은 문자가 적힌 종잇조각을 받아들고 놀라는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축전이나 조전 같은 의례용품으로 격상(?)된데다 그나마 거의 쓰이지도 않지만, 1880년대부터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보는 서민들의 사실상 유일한 긴급 통신 수단이었다. 글자 수에 따라 요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전보문을 쓸 때에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빨리 돌아오기 바람”이라는 말을 저렇게 축약해야 했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무슨 뜻인지 다들 알았다. 그런데 긴급한 일 중에는 기쁜 일보다는 슬프거나 나쁜 일이 많기 마련이다. 특히 6·25 전쟁 당시 자식을 전장에 보낸 부모들에게는 전보 배달부가 그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전사통지서가 대개 전보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도 설득력이 높아졌다.

이 땅에 닿은 최초의 전신선은 1883년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 연결한 해저선인데, 이 선은 육상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육상에 전신선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1885년 음력 8월부터였다. 먼저 청나라가 인천과 한성 사이, 그리고 한성과 의주 사이에 전신선을 가설했고, 뒤이어 일본이 한성과 부산 사이에 전신선을 놓았다. 전신선을 잇기 위해서는 기둥을 세워야 했는데, 이 기둥을 전신주 또는 전봇대라 불렀다. 전보가 사실상 사라지고 전선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오늘에도, 이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길가에 전봇대가 늘어서면서, 긴급 통신 시설이던 봉수대와 파발참이 쓸모없게 되었다. 시일이 흐르면서 전봇대에는 전신선을 잇는 것 외에 다른 기능들이 부가되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광고 전단지를 붙이는 공공 게시판이었고, 가로등을 부착한 허수아비 야경꾼이었으며, 술래잡기나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아이들 놀이에서 술래의 자리였다. 이제 대도시 지역에서는 전선 지중화 공사로 인해 전봇대가 사라지고 있으니, 이도 머지않아 추억의 사물이 될 터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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