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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지난 10년간 남북축구 교류의 불씨를 살린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10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축구화 ‘아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리’는 남한에서 디자인하고 북한에서 생산하는 축구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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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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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지난 10년간 남북축구 교류의 불씨를 살린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10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축구화 ‘아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리’는 남한에서 디자인하고 북한에서 생산하는 축구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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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꽉 막혔다.
공식 접촉은 궤멸했다. 오랜 단절로 남북 체육 당국자들은 얼굴도 잊었다. 정치적 해법은 없었다. 하지만 총포탄이 오가는 엄혹한 시절에도 평양과 서울에선 축구가 열렸다. 변수가 많은 남북 관계에서 축구교류의 한 가닥 끈이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외곬의 사업가’, ‘북한 사람’으로 불리는 그에게 공을 돌린다. 한 해 5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해 교류 물꼬를 지켜온 김경성(58)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주인공이다.
1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1월 역사적인 남북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단일팀이 만들어졌고, 2월 평창올림픽은 북한의 참가로 ‘평화올림픽’의 유산을 남겼다. 올림픽을 매개로 한 남북관계는 폭발적으로 진화해 4월엔 남북의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 스포츠 남북 사업은 정치와 직결돼 있다. 2006년부터 남북 축구교류의 험로를 개척한 그는 지금을 호기로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경계심부터 드러냈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경제협력을 하는 것 다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북스포츠기본조약 체결이다. 정상회담에서 이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문구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정권이 바뀌거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더라도 남북이 스포츠로 교류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스포츠 교류만큼 정치적 부담 없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없다. 1970년대 동서독 스포츠기본조약이 그랬듯이 스포츠 교류의 숨통을 열어 놓으면 궁극적으로 정치의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
“협약 맺었다는 건 나를 신뢰한다는 뜻”
남북스포츠기본조약은 정부 차원에서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대한체육회의 남북체육교류 업무 관계자는 “1월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단일팀 구성을 둘러싸고도 남북스포츠협약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일상적인 스포츠 교류 통로가 있으면 정치협상을 따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정부 관계자도 알고 있었다. 스포츠가 관계개선의 도화선이 된 만큼, 정상회담에서 남북스포츠기본조약이 의제로 들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평창올림픽을 전후한 2개월간 남북 체육인들은 10년 만에 만났다. 실무자는 구면인데도 데면데면했다. 남한 정부 쪽 인사들은 모두 새 얼굴로 바뀌었다. 대화를 새로 시작하려다 보니 낯설고 서투를 수밖에 없다. 남북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조차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눈치를 보면서 미적거리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잃어버린 10년’ 탓이다.
신촌에 빌딩 소유한 ‘보험업계 전설’
2006 월드컵 최종예선 북한팀 만나
대북사업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4·25체육단과 남북체육교류협약
보수정권기 남북관계 얼어붙자
회사 문 닫고 ‘자살’ 문턱 고비까지
“퍼주기라는 사술에 걸리면
모든 영역에서 남북화해는 불가능”
1990년대 보험업계의 전설이었고, 금융보험서비스 업체를 직접 꾸려 서울 신촌로터리에 빌딩까지 보유했던 김 이사장의 운명은 2002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등 두차례 세계대회를 통해 완전히 달라진다. 2002년 월드컵 때 한 정당의 월드컵 홍보 중앙단장을 맡았고, 이후 고향에 세워진 포천축구센터 이사장까지 맡는다. 전지훈련이 필요하다는 축구센터 코치진의 제안에 중국 쿤밍 시설을 현지답사한 그는 아예 중국의 세계적인 기업인 훙타담배그룹이 운영하던 스포츠클럽을 임차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한국 올림픽대표팀 등 각 나라의 축구 전지훈련을 유치하는 등 마케팅에서도 수완을 보였다.
2006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에 참가한 북한 대표팀과의 만남은 대북사업이라는 전혀 다른 소용돌이 속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일종의 호기심과 자만심, 실향민 아들의 관심이 배경이랄까. 윈난성 축구협회 명예주석의 직함을 갖고 있던 그는 2005년 이란, 일본, 바레인과 2006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맞서게 된 북한 대표팀에 고지대 전지훈련 지원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김 이사장이 중국인이 아니라 남한 출신임을 나중에 알고 꺼려했지만, 술이 센 그의 투박한 접근과 열정에 남북의 벽은 쉽게 허물어졌다. 북한의 청소년 축구나 탁구 등 다른 종목까지 지원의 폭이 넓어졌고, 2006년 5월 북한의 4·25체육단과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이 ‘남북체육교류계약’을 맺는 것으로 이어졌다. 김 이사장은 “북한 건군절을 기념하는 4·25체육단은 축구뿐 아니라 모든 종목에서 북한을 대표하는 체육조직”이라며 “협약을 맺었다는 것은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북사업은 본디 살얼음판이다. 변수가 곳곳에 산재한 ‘지뢰밭’이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의 1차 핵실험은 김 이사장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자서전 <불굴의 아리랑>엔 그때의 절망감이 이렇게 적혀 있다. “10월15일 태국에서 열리는 청소년축구대회 남북 단일팀을 출전시키기 위해 3개월 전부터 쿤밍에서 훈련을 시켰다. 10억원 이상의 돈이 들어간 사업이 대회 6일을 앞두고 멈췄다. 통일부는 지원금을 반환하라고 했고, 받기로 한 펀드는 취소됐다. 은행과 개인은 그동안 빌린 돈을 상환하라고 독촉했다. 1997년 내가 세웠던 미래아이앤티는 10년이 안 돼 문을 닫아야 했고, 내 이름으로 돼 있던 어머니의 집까지 경매로 넘어갔다. (여의도 사무실에서 차를 끌고 나와 한강다리 한가운데 섰던) 나는 지는 태양과 함께 한강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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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김기혁 북한 4·25 선수단장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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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창구 구실한 ‘아리컵’ 유소년대회
민간 차원의 대북 교류는 정부 승인하에 이뤄진다. 하지만 정부나 대한체육회, 경기단체 등 공식 기구의 대북 교류에 비해 훨씬 위험 요소가 많다. 특히 재정적 피해는 투자자 본인이 모두 감당해야 한다. “남북의 스포츠 교류는 민간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정치는 절차가 복잡하고, 정권이 바뀌면 책임까지 묻게돼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 상황이나 남북의 정치공학 역학에 따른 외풍은 불확실성을 높인다. 반면 민간 부문에서는 앞뒤 재고 조심조심한다. 개인적으로 북한에 축구공 하나 보내는 것도 후에 문제가 될까봐 포기한 적도 있다. 북한과의 교류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축구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열정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엠비(MB) 정부의 남북 교류 허용 중단, 2010년 천안함 사건, 장거리 로켓 발사로 인한 대북 제재,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의 표적 수사로 인한 구속 위기와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까지 한시도 평탄할 날이 없었다. 1946년 7회 서울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 경평축구를 부활하기 위해 <조선일보> 대표단과 방북해 만든 합의는 무위가 됐고, 평양 남북경협 공장 착공은 2010년 5·24 조처로 직격탄을 맞았다.
그럼에도 2006~2018년 12년 동안 남북한에서 12차례, 중국에서 8차례 등 축구교류 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2007년 북한 청소년대표팀의 사상 첫 남한 방문 전지훈련을 이뤄냈고, 2011년부터 중국의 쿤밍과 하이난, 광저우에서 인천평화컵 국제유소년대회를 개최했다. 또 2014년부터는 개성공단 폐쇄로 가동이 중단된 평양의 축구화 공장을 단둥으로 옮겼고, 제품명인 ‘아리’를 딴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대회를 경기도 연천, 북한의 평양, 중국의 쿤밍에서 개최해 일촉즉발의 남북 긴장 상황에서도 접촉의 창구를 유지시켰다.
2015년 8월21일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2회 아리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남북 갈등 상황 속에서 스포츠가 어떻게 평화의 메신저 구실을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휴전선에서 북한의 목함지뢰가 폭발하면서 국내의 대북 감정이 악화됐고, 8월20일에는 남한의 대북 확성기 가동을 이유로 남북 양쪽에서 포격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평양 시내에서는 ‘서울 불바다’를 주장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남한 정부는 선수단을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남북 양쪽을 설득해 대회를 강행했고, 결국 21일 경기도 대표팀과 중국 유소년팀, 강원도 대표팀과 우즈베키스탄 유소년팀의 개막전이 열렸다. 경기장을 채운 수만의 북한 관중은 대치 상황과는 별개로 ‘동포 이겨라’라고 응원했다.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스포츠라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북한 정부가 김 이사장에게 우호적인 것은 북한 내 인맥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 북한 축구 발전에 대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20살 이하 여자대표팀 아시아 최초 월드컵 우승(2006년), 17살 이하 여자대표팀 월드컵 우승(2008년), 북한 남자축구대표팀의 남아공 월드컵 출전(2010년) 등 국제무대 성적의 배경에는 쿤밍 전지훈련을 적극 지원한 김 이사장이 있다. 김 이사장은 “북한 축구 선수의 자질은 뛰어나지만 국제 경험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돌풍을 일으킨 북한은 과거 남한보다 축구를 훨씬 잘했다.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전 부회장은 “1970년대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북한 선수들은 ‘바나나킥’ 같은 고급 기술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는 전지훈련이나 원정경기 등 국제경험 횟수가 크게 줄었고, 세계 흐름을 아는 지도자들이 많지 않은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평양에 10만평 50년 무상사용 허가받아
북한 입장에서 바깥의 축구 환경을 제공해준 김 이사장이 고마운 것은 당연했다. 북한은 2007년 한국에서 열린 17살 이하 청소년월드컵 조추첨식에 북한의 공동단장 자격으로 김 이사장을 참석시켜 직접 추첨을 하도록 했고, 평양 능라도에 ‘김경성 체육인 초대소’(호텔)를 지었다. 또 평양에 10만평의 땅을 50년 무상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런 북한의 신뢰와 인적 네트워크는 지난해 말 쿤밍에서 열린 남북 프로축구 교류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강원도 유소년팀을 이끌고 간 최문순 지사는 북한 체육계 고위 인사를 면담하면서 평창올림픽 북한 참가의 의미를 강조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여자 아이스하키단일팀 구성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선물로, 남북한 모두 국제 스포츠계에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 노력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대한체육회는 대북 전문가인 이강래 도로공사 사장을 남북교류위원회 위원장, 김 이사장을 위원으로 위촉해 앞으로 확대될 남북 스포츠 교류에 대비하고 있다.
그는 남북 축구의 정점인 양쪽의 프로축구(급) 팀들이 정기 교류전을 펴고, 북한 선수를 남한 프로팀에 입단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다. 북한의 축구리그는 1~3부로 돼 있고, 1부인 갑급 연맹전에는 4·25팀, 소백수팀, 기관차팀 등 12개 팀이 소속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부엔 40개, 3부엔 80개로 축구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규모가 크다. 그는 “북한의 갑급리그와 남한의 프로리그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4강전이나 우승팀 교류를 한다면 그것이 경평축구다. 북한 선수가 남한 프로팀에 입단한다면 북한 주민들이 해당 팀을 응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권에 따라 들쭉날쭉한 대북정책도 문제이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을 ‘퍼주기’라고 하는 인식도 문제다. 그는 “여유가 있는 형이 부족한 동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퍼주기라는 사술에 걸리면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남북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북한에서는 핵심 권력이 체육을 대표하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점을 들어, “남북 체육 대화의 균형을 위하여 청와대에 대북 체육특보나 대통령 직속 남북체육교류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북쪽은 실무자나 체육인도 오래된 전문가다. 우리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축구 남북교류 사업으로 국내의 우파에게 공격도 많이 받았고, 가족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중국과 대만처럼 남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라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 정치나 군사 등 어려운 문제는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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