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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5 13:38 수정 : 2017.09.15 20:39

본선 진출 확정 뒤 터진 ‘감독 의향설’
14일엔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다”
축구협회 공식절차 무시한데다
국제관례 어긋났다는 평가 많아

한국 상황 정확한 정보 있는지 의문
전폭적 지원 했던 2002년 때와는 달라
“히딩크 영입” 누리꾼 댓글 더 많지만
“영웅 갈구하는 구세주 신드롬” 분석도

[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히딩크 감독설 논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 거스 히딩크 감독이 고국인 네덜란드로 떠나기에 앞서 인천공항 대합실에서 ‘붉은 악마’ 회원들로부터 열띤 환송의 박수를 받고 있다. 그는 이날 “‘굿바이’가 아닌 ‘소 롱’이라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히(He) 싱크(Think). 맞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영웅 거스 히딩크(71) 감독은 언론에 의해 ‘히싱크’로 불렸다. 월드컵 변방인 한국을 4위로 올려놓은 그의 능력은 우수한 두뇌에 비유됐다. 연줄이나 연고를 고려하지 않는 선수 발탁과 나이의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수평적 리더십은 신선했다. 원과 화살표의 그래픽으로 선수들 간의 의사소통 빈도와 방향을 표시한 그림이 등장했고, 공포의 셔틀런 훈련은 그라운드에서 강력한 압박축구로 만개했다. 언어의 마술사답게 언론을 선수를 통제하는 데 이용했고, 선수들과의 일대일 관계에서는 전폭적인 신뢰와 복종심을 이끌어냈다. 축구팬들의 마음속 영웅으로 자리잡은 서울특별시 명예시민 허동구는 그렇게 탄생했다.

월드컵 본선 9회 연속 진출에 성공한 축구대표팀 신태용 감독이 7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해, 환영행사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태용 감독, “밤잠을 설칠” 정도로 침통

15년이 흐른 2017년 9월. 강산이 한번 반이나 바뀐 시점에서 히딩크 감독이 논란의 중심에 떠올랐다. 발단은 6일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이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뒤 곧이어 등장한 ‘대표팀 감독 의향’ 설이었다. 한 방송사의 단독보도라는 설명이 붙은 이 기사는 “한국 국민들이 원하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싶다”는 것으로 돼 있는데, 우즈베키스탄 현지의 신태용 감독을 비롯해 대표팀, 경기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절체절명의 순간 소방수로 투입돼 한국 축구를 구한 신태용 감독은 “밤잠을 설칠” 정도로 침통한 기분에 휩싸였고, 두달간 노심초사하며 본선 진출에 온 신경을 쏟아온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 내용이 축구팬들을 실망시킨 점과는 별개로,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축구대표팀 감독은 마치 동네 이장처럼 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얻는 자리가 아니다. 축구협회 기술위원회라는 공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고 회장의 재가를 거쳐 선임된다. 신태용 감독은 현재 축구협회가 계약을 맺은 유일한 감독으로 러시아 월드컵 본선이 끝날 때까지 사령탑을 맡도록 문서로 명문화돼 있다. 일종의 야인인 히딩크 감독이 엄연히 감독이 재임하는 가운데 대리인을 통해 “내가 하고 싶다”고 의향을 밝힌다는 것은 금도를 넘어선 일이다.

국제적인 관례도 아니다. 애초 히딩크 감독 의향설 첫 보도 때부터 축구인들이 설마설마하며 히딩크의 발언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이유다. 실제 2002년 월드컵 전후 히딩크 감독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한 관계자는 첫 보도와 관련해 “히딩크 감독이 노망이 들지 않은 이상 그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업적을 다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러시아 본선에 가서 3패라도 해봐라. 그럼 한국의 팬들이 이전의 업적은 깡그리 잊고 패배의 책임을 물을 것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 대표팀 감독을 했던 만큼 기술고문 정도는 한번 생각은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도 가끔 히딩크와 통화를 하는 이 측근의 예측은, 그러나 틀렸다. 히딩크 감독은 첫 보도 뒤 일주일이 지난 14일(현지시각) 유럽의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 연 기자회견에서 다시 한번 “한국민이 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다”고 밝혔다. 그것이 기술고문이든 감독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조건이 되면 대표팀을 맡겠다는 뜻이다.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경기도 안성시 중리동 팀2002 안성풋살돔구장에서 열린 구장 건립 기념행사에서 시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에선 ‘이미 현역 은퇴’ 시각 많아

정말 히딩크의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역시 2002년 전후 히딩크 감독을 보필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대표팀 감독 생각이 있다면 진즉에 가까운 사람한테 연락해 알아봤을 것이다. 이번에는 단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한국 상황을 물어보고 정보를 구하고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게 히딩크 감독이다. 절대로 허투루 움직이는 분이 아닌데, 기술고문도 아니고 감독에까지 문을 열어놓은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유럽에서도 이미 나이 70살을 넘긴 히딩크 감독은 현역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4월 영국의 <더 타임스>는 ‘히딩크가 감독 세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사에서 “중국 클럽에서도 요청이 오지만 거절했다. 만약 기회가 되더라도 코치를 양성하는 기술고문 역할 정도가 될 것”이라며 일선에서 물러난 것에 방점을 둔 보도를 했다. 실제 히딩크 감독은 프랑스의 니스 등 휴양지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6월 러시아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는 해설자로 현장에 날아갔고, 내년 월드컵 때는 미국 <폭스> 방송의 해설을 맡기로 약속하는 등 연간 계획도 이미 잡혀 있다.

그럼에도 히딩크 감독이 불쑥 대표팀 사령탑에 관심을 표명한 배경은 무엇일까. 축구 전문가들은 히딩크 감독이 6월에 축구협회에 전달했다는 메시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히딩크 감독의 대리인 격인 노제호 거스히딩크재단 사무총장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해임되고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6월19일 당시 축구협회 김호곤 부회장에게 이런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부회장님,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국대 감독을 히딩크 감독께서 관심이 높으시니 이번 기술위원회에서는 남은 두 경기만 우선 맡아서 월드컵 본선 진출시킬 감독 선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 진출 확정 후 좀 더 많은 지원자 중에서 찾는 게 맞을 듯해서요.”

이 메시지는 카톡이라는 형식도 가볍고, 내용도 불투명하다. “국대 감독을 히딩크 감독께서 관심이 높으시니” 식의 표현은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감독을 하고 싶다”는 명확한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결과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히딩크 감독이 직접 하지 않고 제3자가 전달한 것이지만, 마치 ‘갑’의 입장에 서서 감독직을 선택할 수 있다거나 축구협회의 대표팀 감독 선임 절차를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노제호 사무총장이나 히딩크 감독은 이 메시지를 근거로 자신의 뜻이 이미 3개월 전에 축구협회에 전달됐다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이는 쪽이 달리 생각할 여지는 많다. 더욱이 김호곤 부회장은 당시 대표팀 감독 선임을 결정하는 기술위원장이나 실무자인 기술위원이 아니었다.

히딩크 감독

청와대 신문고 청원 등 극단적 움직임도

“남은 두 경기만 우선 맡아 본선 진출시킬 감독 선임”이나 “본선 진출 확정하면”이라는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희망이며, 가정법에 근거한 비현실적인 독백이다. 역대 최악의 월드컵 예선 마지막 일정을 앞둔 상황에서 “본선에 올라가면 특정 감독이 새로 지휘봉을 맡게 된다. 지금 당장 발등의 불을 꺼달라”며 해임 일정을 알리고 계약하는 축구협회는 지구상에 없다. 과거 최강희 감독이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뒤 사임했지만, 이미 소속팀 전북 현대 사령탑 복귀를 전제하고 대표팀 감독에 오른 경우였다. 축구협회가 “일절 히딩크 감독과 접촉이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협회의 감독 선임 자율성까지 침해하는 듯한 불쾌감에 더해, 본선에 오르지 못할 경우 회장 이하 집행부 전원사퇴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기 얘기만 하는 히딩크 감독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재훈 전 에스케이 감독은 이런 견해를 밝혔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사랑하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메시지는 좀 다른 것 같다. 신태용 감독이 본선행 티켓을 따오고, 특유의 공격축구 예고로 팬들의 기대를 모으는 상황에서 문제를 키우고 있다. 본선을 앞두고 감독 바꿔 평가전 몇차례 하고 본선 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지금은 신태용 감독을 믿는다는 말 한마디가 절실한 시점이다.” 통화를 한 여러 경기인들의 입장도 똑같았다. 더욱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장기간 합숙훈련이 가능했던 15년 전과 달리 지금은 3~5일 소집 훈련 등 환경이 달라졌다. 지도자에 대한 선수들의 눈높이도 과거보다 격상돼 히딩크 리더십이 통할지도 의문이다.

전문가 집단의 인식과 달리,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감독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국내 사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 축구팬들은 우즈베키스탄과의 월드컵 예선 최종 경기(0-0)에 실망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본 팬들은 여러 차례 골 기회를 놓치는 선수들을 보고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누리꾼들의 댓글은 7 대 3 정도로 히딩크 감독의 영입을 촉구하는 흐름으로 나온다. 청와대 신문고에 청원을 하고, 광화문 촛불시위로 히딩크 모시기 집회를 열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등 극단적인 움직임도 있다. 역대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이 단 한번이라도 쉽게 간 적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대표팀 상황은 비슷한데, 인터넷 공간의 댓글 여론은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정준영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온라인 토론은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과 달리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공부 없이 감정을 노출하고, 공격적이며 거친 단어를 쓰면서 강하게 자기 의견을 전달하기 때문에 열기가 뜨거워진다”며 “일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방의 공격에 넌더리를 내며 나가기 때문에 한쪽 여론이 댓글을 도배하게 된다. 가뜩이나 월드컵 축구는 몰입도가 가장 큰 스포츠여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이런 누리꾼들의 반응이 반드시 부정적인 측면만 지닌 것은 아니다. 2012년 일본과의 평가전 패배 등을 빌미로 조광래 감독을 경질했고, 최강희·홍명보·슈틸리케까지 여러 명의 감독을 뽑으면서 스스로 철학과 원칙을 보여주지 못한 축구협회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네덜란드에서도 실패한 히딩크 감독을 불러오자는 것은 백마 탄 영웅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는 구세주 신드롬이다. 이것은 광기처럼 오래가지도 않고,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이 아니다. 다만 그런 화풀이에는 히딩크 시절의 좀 더 세분화되고 실질적인 코칭스태프 구성이나 축구협회의 비전 있는 대표팀 운영 등에 대한 바람이 숨어 있다는 점을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거스 히딩크 전 2002년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4일 낮 암스테르담 한 호텔에서 한국 취재진과 간담회를 열고 “한국 축구를 위해서, 한국 국민이 원하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일이든 기여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정보 왜곡돼 전달받았을 가능성

노제호 거스히딩크재단 사무총장이 과연 한국의 상황을 두고 히딩크 감독과 ‘정보의 왜곡’ 없이 제대로 소통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따져봐야 한다. 히딩크를 잘 알고 있는 국내 히딩크 측근들이 히딩크 감독의 의중을 알지 못한 것을 보면, 히딩크 감독의 한국 정보는 노제호 사무총장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찍이 축구매치 에이전시인 스카이콤 대표를 지낸 노제호 총장은 히딩크가 러시아 대표팀 감독 시절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거스히딩크재단을 책임지면서 장애아를 위한 드림필드 구장 확대와 남북교류 사업까지 히딩크 감독의 의중을 받들고 있다.

하지만 일부 축구사업에 실패하는 등 국내 축구판에선 높은 신뢰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10월7일 예정된 러시아와의 평가전은 한국과 러시아 축구협회가 합의해 성사된 대회임에도, 히딩크재단이 밥숟가락 얹듯 끼어들어 초청자가 된 것을 두고 축구협회 내부에서도 달갑지 않은 시선이 있다. 히딩크 감독은 14일 기자회견에서 노제호 사무총장을 신임하고, 그간 노 총장의 한국 내 발언은 자신의 뜻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노 총장의 입지를 다져주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이 취사선택된 정보 탓에 한국 내의 정서를 정확히 읽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장익영 한국체육대 교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미디어가 클릭수를 의식하게 되면 맥락이나 진의가 달리 전파되기도 하고 오해가 확대될 수 있다. 또 일률적인 댓글이 많아지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오인할 수 있다. 독자들도 문맥을 찬찬히 따져보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언론도 더 신중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히딩크 감독과 한국 축구팬들의 관계는 절대적인 애정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 작고한 피천득의 <인연> 마지막 대목은 음미해볼 만하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도 비슷하지 않을까. 2002년 처음 만났을 때가 정점이었기에, 다시 좋은 인연이 될 확률은 복권에 두 번 연속 당첨되는 것처럼 낮을 것이다. 시인이 세 번째 만남에서 시들어가는 아사코한테 실망한 것처럼, 축구팬들도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히딩크 감독을 기억 속에 두는 것이 팬이나 히딩크 감독을 위해서 좋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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