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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6 06:01 수정 : 2017.08.26 10:35

[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NC 다이노스 투수코치 최일언

최일언 엔씨(NC) 다이노스 투수 코치가 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엘지(LG) 트윈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투수 만들기의 장인으로 불린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에게 야구는 “사랑”이다. “야구를 사랑해서 선수가 됐고, 선수 때도 야구를 사랑했으며 선수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는 일본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의 에이스였고 한때는 ‘해태 킬러’였다가 지금은 투수 키우기 장인이 된 최일언(56) 엔씨(NC) 다이노스 투수코치. 오비(OB·옛 두산) 코치 시절 진필중, 이혜천, 박명환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고 에스케이(SK)에 몸담았을 때는 김광현, 정우람 등이 그와 함께했다.

2013년 1군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엔씨가 신생팀답지 않게 안정된 마운드를 구축할 수 있던 데도 베테랑 최 코치의 지도력이 한몫했다. 엔씨의 팀 평균자책점은 데뷔 시즌 3위를 거쳐 2014년부터 올해까지 줄곧 1~2위를 기록 중이다. 선수층이 두텁지 않은데도 김진성, 원종현, 임창민 등 새로운 얼굴들이 계속 등장해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다. 방출, 트레이드 등의 이력을 갖고 엔씨에 둥지를 튼 투수들의 재발견에 최 코치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 프로야구 첫 포크볼러이기도 한 최일언 코치의 야구 사랑 이야기를 풀어본다.

명문 시모노세키상고 에이스 출신
3학년 때 고시엔 1·2라운드 완투
봉황기 초청돼 ‘조부모 나라’ 찾아
실업입단 앞두고 한국 프로행 결심

프로 통산성적 평균자책점 2.87
86년 선동열 이어 다승 2위 차지
32살 이른 나이에 지도자 길 나서
신생팀 엔씨 마운드 다지는데 초석

스파이크 케이스에 고시엔 흙 담아와

그의 야구 시작은 이랬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야구 명문 시모노세키상고 교문 앞에서 힘차게 외쳤다. “나 고시엔 대회에 설 거야!” 당시 그는 야구부 소속도 아니었다. 다만 매일 밤 야구를 시청하던 아버지를 따라 야구를 즐겨 보던 아이였을 뿐이다. 중학교 때도 정식 야구부가 아닌 동아리 야구부에서 연식 야구를 했다. 야구를 꽤 잘하면서 알음알음 소문이 났고 원하던 대로 시모노세키상고에 진학했다. 신입생 360명 중 11등의 성적이었으니까 공부도 꽤 잘했다.

3학년 때 그토록 원했던 봄 고시엔(여름 고시엔만 알려져 있지만 고시엔은 봄, 여름 두 차례 열린다) 본선 무대에 섰다. 시모노세키상고 에이스는 그였다. 개막전으로 진행된 1라운드에서 다르빗슈 유(LA 다저스)의 모교이기도 한 도호쿠고에 6-1로 이겼다. “1회초 몸에 맞는 공으로 처음 타자를 출루시켰는데 이를 잊고 와인드업하고 공을 던져 1루 주자가 도루하면서 2루로 서서 들어갈 정도로 긴장했던” 경기였다.

2라운드 때는 강호 미노시마고를 상대로 3회까지 1-0으로 앞서다가 4회에만 실책 4개가 겹치는 불운 속에 5점을 내주며 4-10으로 패했다. 최 코치는 “고시엔 지역 예선 때 연습경기를 포함해 내 평균자책점이 0.57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 회에 5점을 내줬으니 이후에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던졌다”고 했다. 시모노세키상고를 꺾은 미노시마고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 2라운드 모두 완투했던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스파이크 케이스에 고시엔 흙을 담아왔다. 최 코치의 청춘이 담긴 그 흙은 아직도 그대로 보관돼 있다.

봄 고시엔이 끝난 뒤 투구 속도를 올리려고 투구폼을 스리쿼터형에서 오버스로형으로 바꿨다. 하지만 역효과가 났다. 제구가 나빠진 것. 최 코치는 “볼 빠르기에 욕심을 내다가 다른 것이 망가졌다”고 했다. 스스로의 경험상 그는 젊은 투수들에게 속도에 대한 강박증을 털어내라고 주문한다. “야구는 볼 빠르게 던지기 대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일언 엔씨 투수코치의 현역 시절 모습. 두산 베어스 제공
해태 타자들이 꼼짝 못했던 투수

조부모의 나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고3 여름방학 때였다. 재일동포 야구팀으로 봉황대기에 초청됐다. 임시 여권을 하루 만에 만들 정도로 급박하게 참가를 결정했다. 당시 팀을 이끌던 한재우 감독과의 인연은 한국 프로리그 진출 때도 이어졌다. 센슈대 4학년 때 2년 뒤 프로에 도전하기로 하고 좋은 조건으로 실업팀 입단을 앞두고 있었는데 한 감독의 끈질긴 설득으로 한국 프로행을 결정지었다. 최 코치는 “한 감독이 ‘한국에도 프로리그가 생겼으니 구경하러 가자’고 해서 왔을 뿐이었는데 입국 다음날 두산과 계약했다. 가기로 했던 일본 실업팀에는 참 미안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오비, 엘지, 삼성 등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했다. 통산 성적은 78승57패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7. 강속구로 상대를 윽박지르기보다는 변화구 제구와 수싸움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신인 때는 몸쪽 속구를 많이 던졌는데 삼진을 잡는 결정구는 포크볼이었다. 고시엔 때만 해도 커브를 주로 던졌는데 고3 때 처음 포크볼을 연습했다. 포크볼 연마를 위해 공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테이프를 감은 채 잠을 자기도 했다.”

86년에는 19승4패, 평균자책점 1.58의 성적으로 선동열(해태·24승)에 이어 다승 2위에 올랐다. 승률은 1위(0.826)였다. 시즌 중반에 배운 싱커 제구가 기가 막혔다. “몸쪽 속구는 자신있게 던졌지만 바깥쪽 속구를 잘 못 던졌다. 대신 속구보다 시속 1~2㎞ 정도 느린 싱커를 던졌는데 바깥쪽으로 휘어 날아가면서 맞아도 땅볼이 나왔다. 싱커 던지고 ‘이번에는 유격수 땅볼이 되겠다’ 하면 진짜로 유격수 땅볼이 될 정도로 제구가 잘되던 시절이었다.”

포크볼에 이어 싱커까지 구종을 추가하면서, 86년부터 88년까지 최일언 코치는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 전신)를 상대로 13연승을 거뒀다. 김봉연, 한대화, 김성한, 김종모, 이순철 등 해태 타자들을 꽁꽁 묶었다. 최 코치는 “당시 해태 타자들이 몸쪽 속구에 약점이 있었다. 그들의 타격폼으로는 절대 몸쪽 속구를 못 쳤다”고 했다.

이순철 <에스비에스스포츠> 해설위원은 “최 코치가 현역 때 커브를 많이 던졌는데 타자 앞에서 큰 폭으로 빠르게 꺾였다. 칠 수 있는 변화구가 아니었다”며 “변화구 각도에 몸쪽 제구도 잘되다 보니까 속구가 더 빨라 보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해태 타선에 좌타자가 별로 없던 것도 일방적으로 13연패를 당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최 코치는 “사실 바깥쪽 제구가 안 돼 일부러 몸쪽을 공략한 것도 있었다. 나 스스로는 제구가 좋은 투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강점을 극대화해 약점을 가리는 것, 그것이 그가 프로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최일언 엔씨 다이노스 투수코치가 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엘지 트윈스와의 경기 전 훈련에서 한 투수의 투구 폼을 교정해주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야구를 제일 못하는 선수는 아픈 선수”

32살. 최 코치가 처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나이다. 다소 이른 나이처럼 보이지만 평소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그였다. 최 코치는 “코칭은 선수가 얼마나 코치를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며 “코치가 ‘이건 다이아몬드야’ 하고 가르치는데 선수가 다이아몬드라고 안 믿으면 끝이다. 다이아몬드라고 했는데도 옆에서 석탄만 부지런히 캐고 있는 선수도 더러 있다”고 했다. 그는 “하고자 하는 마음의 문제”라고 표현했으나 결국 ‘신뢰’의 문제다.

김진성이 그렇다. 2005년 프로에 데뷔해 두 차례 방출되는 등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냈던 김진성은 2012년 엔씨에 둥지를 튼 이후 비로소 빛을 냈다. 최 코치는 “김진성의 경우가 이전까지 열심히 ‘석탄’만 판 경우였다. 공 잡는 법, 어깨 회전 하는 법도 정확하게 몰랐다. 그나마 마지막 기회를 만나 포크볼도 배우는 등 진짜 열심히 했다. 김진성만큼 공들인 선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2013년 28살의 나이에 1군 무대에 오른 김진성은 현재 공룡군단의 든든한 ‘믿을맨’이 돼 있다.

‘파이어볼러’ 원종현 또한 최 코치를 만나 사이드스로 투수로 변신하며 재발견됐다. “원종현은 처음 우리 팀에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 때 포수 뒤에서 볼 때는 시속 130㎞대 공으로 보였는데 스피드 건에는 시속 143㎞로 찍혔다. 밸런스는 좋았는데 볼을 전혀 채지 못하고 밀어서 던지고 있었다. 스리쿼터로 던져보라고 하니 그때서야 손목을 쓰면서 볼을 챘다. 그때부터 아예 사이드로 던지자고 제안했고 연습 끝에 2012년 2군에서 시속 153㎞가 나왔다.” 뒤늦게 꽃을 피운 원종현은 암 수술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지난해 성공적으로 팀에 복귀해 역시 불펜의 한 축으로 활약 중이다.

2015년부터 엔씨 뒷문을 책임지고 있는 임창민 또한 넥센 시절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임창민의 경우 김경문 감독께 직접 트레이드를 부탁했다. 그런데 처음 팀에 왔을 때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투수의 기본은 하체인데 하체 쓰는 법을 잘 몰랐다. 2군에서 열심히 내 훈련 방식대로 하체운동을 시켰더니 첫날 하체운동 뒤에는 아예 일어나지도 못했다. 선발로 생각했는데 어느날 불펜으로 쓰니 잘했다. 자기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최 코치는 “야구를 제일 못하는 선수는 아픈 선수”라면서 가깝게는 윤호솔(윤형배에서 개명), 멀게는 김경원을 예로 들었다. 윤호솔은 2013년 엔씨에 우선 지명(계약금 6억원)되며 큰 기대를 모았으나 팔꿈치 수술과 군입대 등으로 지금껏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김경원은 90년대 오비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으나 부상 때문에 전성기가 짧았다. 최 코치는 “김경원은 무릎, 발목 등이 안 좋았는데 축이 되는 오른쪽 다리가 아프니까 야구가 잘 안 됐다”고 했다. 수많은 제자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은 구자운(은퇴)이다. “소질은 제일 많았는데 팔꿈치·어깨가 안 좋은 상태로 프로에 와서 성적이 기대만큼 안 나왔다”고 한다.

윤호솔처럼 갓 입단한 투수들조차 수술대 위에 오르는 프로야구 현실을 그는 어떻게 바라볼까. “일단 우리나라는 어깨 좋은 선수 순으로 신인 지명을 한다. 그렇다 보니 어깨가 강하다는 장점만 있을 뿐 투수로서 완성된 선수는 거의 없다. 투수라기보다는 강하게 던질 줄 아는 선수라고 봐야 한다. 그저 힘껏 던지려고만 하다 보니 부상이 많다. 지금 아마추어 현장에 90년대 초반 미국 야구처럼 ‘스텝을 짧게 해서 위에서 꽂아라’라고 가르치는 지도자가 있는데 그 시대의 이론은 지금 맞지 않다. 오히려 지금은 반대로 던져야 한다.”

최 코치는 투구 때 중심이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땅을 밟고 하는 운동이다. 땅에서 나오는 힘을 그대로 몸에서 받아 손끝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아무리 어깨가 강한 상대 선수라도 이길 수 있다. 공 던질 때 힘은 없는데 중심이동이 잘돼 있는 선수들도 있고 힘은 있는데 중심이동이 엉망인 선수도 있다. 전자는 힘만 키우면 금방 큰 선수가 될 수 있는 데 반해 후자는 기복이 크고 부상 위험도 높다. 선수 개개인의 골격, 근육, 관절 등을 모두 고려해 투구할 때 최대한 가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맞춤식 지도를 해야만 한다. 투수의 경우 웨이트트레이닝보다는 러닝이나 유연체조에 더 신경써야만 한다.”

‘코칭’을 ‘서랍 여는 법’에 비유하는 이유

최일언 코치는 어린 선수들에게 종종 “젊을 때 흘리지 않는 땀은 늙어서 눈물로 나온다”는 말을 해준다. 그가 다녔던 센슈대 합숙 장소에 붙어 있던 문구였다. “스스로 야구를 잘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도 한다. 어린 선수에게 가장 큰 적은 자만심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 ‘코칭’이란 무엇일까. 최 코치는 ‘코칭’을 ‘서랍 여는 법’에 비유했다. “서랍마다 여는 방법은 다양한데 흠집 없이 잘 열려면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서랍 종류가 다르듯 선수들 특성도 제각각이다. 미리 결론 내서도, 성급해서도 안 된다. 지도란 것은 결국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보태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일언 코치는 오늘도 매의 눈으로 선수를 지켜본다. 더 잘할 수 있게 보태줄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가 정말 사랑하는 야구를 위해.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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