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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02 08:59 수정 : 2017.04.02 16:22

‘염 긱스’, ‘염 크로스’ 등으로 불리며 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수원 삼성)은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100도움 이정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수원 삼성 MF 염기훈 탐구

‘염 긱스’, ‘염 크로스’ 등으로 불리며 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수원 삼성)은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100도움 이정표를 눈앞에 두고 있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3개도 못 했다.”

공과의 익숙함을 위해 하는 리프팅.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튕기는 이 기술을 몰랐다. 처음 해봤기 때문이다. “발목은 펴서 차라고 하는데 공은 마음먹은 대로 튕기지 않았다.” 그러나 실망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집중하라는 말에 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튕기던 소년은 드디어 감을 잡았다. 일주일 뒤부터는 달라졌고, 한 달쯤 돼서는 고무줄을 단 것처럼 떨어뜨리지 않았다. 과거엔 고등학교 때 리프팅을 처음 시작해 나중에 국가대표로 뽑혀 월드컵에 출전한 전설적인 사례가 있지만, 기술축구를 지향하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중학 1학년 축구 선수는 출발부터 늦었다. 하지만 축구가 좋은 낙천적인 소년은 걱정하지 않았다. 공을 찬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왼발의 달인’ 염기훈(34)은 이솝 우화의 거북이다. 논산중이나 강경상고는 전국구 학교가 아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호남대 축구부도 전통의 명문은 아니다. 본인도 “시골 학교”라든지 “촌놈”이라고 했다. 청소년대표팀이나 올림픽대표팀에 한번도 불려가지 못했다. 주류보다는 변방이었고, 학벌이나 연고도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가 달랐고, 그건 반짝 치고 나가다가 낮잠에 빠진 경쟁자들과 달리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들었다. 바로 성실성이다.

서현옥 전 호남대 감독은 이렇게 회상했다. “조그맣고 체력도 약해 어디서 받아주질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대학에 테스트를 받으러 왔는데 몸매가 부드럽고 왼발의 장점이 있었다. 축구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11명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성이 돼야 한다. 전혀 때가 묻지 않고 천진난만했다.” 입학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축구를 좋아한 이사장은 “별 볼 일 없다. 받지 마라”며 염기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서 감독은 그런 선수를 일주일간 데리고 있으면서 “보증한다”, “영리한 선수”라며 이사장을 설득해 입학을 시켰다. 만약 그때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팬들은 ‘염 긱스’, ‘염 크로스’로 불리며 K리그에 우뚝한 ‘왼발 마법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 3학년 때 대학선발팀 첫 호출

염기훈은 늦깎이 스타일이다. 실력도 대학에서 가장 많이 늘었다. 그는 “중고등학교에서는 체력훈련과 뛰는 것을 많이 했다. 대학에 와서 움직임이나 슈팅 등 스킬을 다시 다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서현옥 감독이 프로팀 전남의 수석코치로 옮겨 가면서 새롭게 부임한 신연호 현 단국대 감독과의 만남은 전환점이었다. 신 감독은 염기훈에 대해 “성품이 성실하고 천성적으로 노력하는 선수였다. 왼발은 원래 기술적으로 잘 썼고, 공을 몸에 붙여놓고 다니도록 주문을 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는 약했고, 철이 부족해 늘 빈혈에 시달렸다”고 돌아봤다.

자전거 타다가 오른발 크게 다친 뒤
왼발 자주 쓰다 보니 왼발잡이 돼
처음엔 근대2종 선수로 중학교 입학
1학년 때 축구 시작해 주전으로 뛰어

‘염 긱스’ ‘염 크로스’로 불리는 왼발 마법사
2015 시즌엔 50골-50도움 고지 올라
K리그 최초 100도움 기록 눈앞에
3년 연속 도움왕 가능성도 높아

애초부터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대표팀과의 인연이 많지 않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연호 감독은 “스피드는 눈에 보이는 육체의 스피드와 보이지 않는 생각의 스피드가 있다. 그런데 생각의 속도가 빨라야 한다. 미리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볼을 잃지 않으면서 빨리 할 때와 천천히 늦출 때를 구분해 템포를 조절하는 것도 두뇌에서 이뤄지는 축구다. 염기훈은 “항상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여기에 훈련이 더해졌다. 신연호 감독은 “대학 시절 공만 가지고 놀았다. 항상 성실한 선수”라고 회고했다.

큰 폭으로 휘어지는 강력한 크로스, 골대 구석을 찌르는 프리킥 등은 쉬운 기술이 아니다. 움직이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크로스는 항상 달라붙는 상대를 떨구거나 피해서 해야 한다. 그 압박을 뚫고 자로 잰 듯이 공을 올리는 것은 두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골대로 파고드는 동료 공격수의 발걸음을 생각하며 올린다. 상대 수비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시간이 지체되면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골문 앞쪽에 더 붙여 띄운다.” 세워놓고 차는 프리킥의 감각은 금 간 물동이 같아서 채우지 않으면 시나브로 바닥이 드러난다. 그것은 한번 익히면 평생 가는 자전거타기와 다르다. 염기훈은 “하루라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감각이 달라진다. 본인이 먼저 안다”고 했다.

왼발로 특화한 염기훈은 대학 시절 전국대회 5차례 준우승을 경험한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름 석자는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대학 3학년 때 대학선발팀에 처음 호출되는 등 기지개를 폈다. 염기훈은 “어떤 식이든 대표팀에는 처음 들어간 셈이다. 드디어 나한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부에서 득점왕과 도움왕을 차지했는데 노력한 만큼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더욱이 왼발은 희소성이 있었다.

엘리스 캐시모어는 <스포츠, 그 열광의 사회학>에서 “왼손잡이가 절대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 스포츠 스타 대열에서 훨씬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내용을 지적했는데, 왼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팬에게 익숙한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나 바이에른 뮌헨의 아리언 로번, 레알 마드리드의 개러스 베일 등 세계적인 선수들은 왼발잡이이다. 더 이전의 라이언 긱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라위프, 페렌츠 푸슈카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도 왼발잡이다. 오른발잡이인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20세기의 펠레도 많은 팬을 갖고 있지만, 왼발 선수는 상대적으로 눈에 띈다. 전술적으로도 왼발은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다. 대개의 선수가 오른발잡이여서 왼발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방향 전환에 수비가 쉽게 대응하지 못할 수가 있다. 왼쪽 윙이나 풀백이 왼발을 잘 쓴다면 반박자 빠르게 공을 띄울 수도 있고, 회전량이 다른 공으로 골키퍼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국내에서는 왼발잡이 킥 전문가로 고종수 수원 삼성 코치를 비롯해, 신태용 20살 이하 월드컵대표팀 감독, 하석주 아주대 감독 등이 손꼽힌다. 고종수 코치는 200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올스타와 한·일올스타 축구대결에서 칠라베르트 골키퍼를 꼼짝 못하게 한 킥으로 정점을 달렸고, 신태용 감독은 성남의 레전드로 코너킥을 왼발, 오른발 섞어가며 자유자재로 찼다. 하석주 감독은 2000년 4월 잠실 한·일전에서 골대 위 구석 좁은 공간을 뚫고 가는 결승골을 터뜨린 바 있다. 모두 선천적인 자질을 타고난 천재과다.

‘연봉 3배’ 중동팀 이적 제안 거부

그런데 염기훈의 왼발은 후천적인 노력의 산물이어서 다르다. 애초 왼발잡이가 아니었다. “유치원 다닐 때 자전거를 타다가 체인과 톱니바퀴 사이에 오른발이 끼었다. 엄지발가락과 그 아랫부분까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오른발은 아파서 공을 찰 수가 없었다. 왼발을 자주 쓰다 보니 왼발잡이가 됐다.” 축구화를 벗은 염기훈의 왼발은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양발 모두 가운데 발가락이 긴 편이다. 오른쪽 엄지발가락 아래에는 아직도 자전거 체인에 팬 상흔이 남아 있다. 다만 어려서부터 많이 사용한 탓인지 왼발이 좀 길어 보일 뿐이었다.

발을 두뇌나 의식이 연장된 것으로 본다면, 염기훈의 왼발은 많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 그 왼발은 우리 나이 서른다섯의 염기훈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3월말 현재 염기훈은 K리그 통산 88개의 도움주기를 쌓아, 이 부문 기록 보유자다. 하나를 더 보탤 때마다 신기록이 만들어진다. 올해 12개를 추가하면 K리그 사상 최초로 100도움 이정표를 세운다. 2015년(17개), 2016년(15개) 도움 부문 1위에 올라 3년 연속 도움왕 가능성이 있다. 2015년 50골-50도움 고지를 밟는 등 수준급 골잡이로서의 면모도 자랑한다.

후배들은 4년째 주장인 염기훈에게 비법을 자주 물어본다고 한다. 하지만 염기훈이 하는 얘기는 고정돼 있다. 그는 “연습을 하라”고 답하는데, 너무 당연한 얘기라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연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특히 프리킥은 연습 없이는 불가능하다.” 프로농구 선수가 훈련 전 수없이 많은 슛을 던지고, 야구 선수가 배팅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실천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다. 하재훈 전 에스케이(SK) 감독은 “꾸준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생활의 사이클이 항상 일정해야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런 정성이 그라운드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했다. 통상 만 15살이 되면 신경의 발달이 끝난다고 한다. 그 이상의 나이가 되면 기술적인 진전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염기훈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

염기훈은 원래 근대2종 선수로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1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주전으로 뛰었다. 남들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염기훈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염기훈은 유치원 시절 자전거를 타다 오른발을 다친 뒤 왼발을 자주 쓰다 보니 왼발잡이가 됐다. 아직도 오른쪽 엄지발가락 아래에는 자건거 체인에 팬 상흔이 남아 있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이런 까닭에 슈틸리케호에 승선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프로에서 풀타임을 뛸 정도이면 대표팀에서 조커로 투입돼 경기의 흐름을 바꿔줄 수 있다. 왼발 프리킥이나 크로스가 워낙 예리하기 때문에 월드컵 예선 때 기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대표선수 선발은 감독의 전권 사항이다. 3명만 교체를 허용하는 상황에서 조커용으로 선수를 발탁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하재훈 전 감독은 “측면의 날개 공격수는 공격과 수비를 다 해야 한다. 체력적으로 강해야 한다. 염기훈은 이런 조건을 맞출 수 있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색깔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처럼 팔팔한 염기훈은 대표팀에 큰 미련이 없다. 오히려 소속팀에 전념하는 것이 한국 축구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표팀을 응원한다. 대표팀이 잘해야 K리그가 살아난다”고 했다. 거꾸로 프로팀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야 대표팀도 강해진다. 한국 대표팀이 해외파 부진으로 주춤하고 있는 반면, 일본 대표팀이 저력을 회복해 월드컵 예선에서 후반 치고 나가는 배경에는 자국의 탄탄한 리그가 있다. 염기훈은 “수원 팬 앞에서 열심히 뛸 때 행복하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축구만을 생각하면 길이 열렸다. 육상과 수영을 하는 근대2종 선수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축구부에 들어가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것은 학교에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고향의 학교여서 당연히 주전을 꿰찼다. “갈 데가 없어”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간 호남대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이태 전에는 연봉의 3배가 넘는 액수의 중동팀 이적 제안을 고심 끝에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돈도 중요하지만 선수로서 마무리도 잘해야 한다. 앞으로 수원 출신으로 지도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다”고 했다.

교통사고 당하고도 경기 출전

사실 염기훈은 수원과 궁합이 잘 맞는다. 2006년 처음 전북 현대에서 프로에 데뷔한 이래 울산을 거쳐 2010년 수원까지 오는 동안 그는 해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절친인 김형범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에 구멍이 난 채 경기에 출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수원 이적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009년 울산 현대 시절 도움주기는 3개에 그쳤지만, 2010년 이적 이래 도움 3위(8개), 2011년 도움 2위(13개)로 고공행진을 했다. 2012~13년 경찰청에서 군복무를 할 때는 도움왕(11개·2013년)을 차지했는데, K리그 클래식과 챌린지에서 각각 도움왕에 오른 이는 염기훈이 처음이다. 수원 이적 뒤 큰 부상의 공포도 털어버렸다.

성실함은 그가 지금까지 지녀온 유일한 무기였다. 그야말로 얼굴에 성실이라고 쓴 채 거친 파도를 헤쳐왔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성실은 필수 덕목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반드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오늘 절망하고 낙담하는 이유다. 축구판은 다른 모양이다. 몸이 전부인 축구 선수에게 성실함은 천재성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다. 염기훈의 사례는 최소한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왼발을 가리키는 그의 가느다란 손은 ‘오 나의 왼발'이라며 숭배하는 듯하다. 은퇴는 생각하지 않는 염기훈은 “집사람과 두 아이에게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되기 위해 운동장에서 열심히 뛴다. 경기장을 찾아온 관중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준비하고 집중하는 것은 나의 일이고 의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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