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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표팀을 맡게 된 김인식 감독은 “전력이 떨어질수록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스스로 나서서 서로 양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며 믿음과 신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지난달 8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김 감독이 야구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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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김인식 WBC 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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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표팀을 맡게 된 김인식 감독은 “전력이 떨어질수록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스스로 나서서 서로 양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며 믿음과 신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지난달 8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김 감독이 야구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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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생활을 오래 했던 이승엽(삼성)은 김인식(70) 감독을 이렇게 표현한다. “감독님은 격이 없으시다.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먼저 친근하게 선수들에게 다가와주시니까 대표팀에 있을 때 참 편했다. 여러 팀 선수들이 대표팀으로 한곳에 모이면 서먹서먹한 부분도 있는데 감독님 자체가 그렇지 않으시니 팀 분위기도 좋았고 훈련도 즐겁게 했다. 성적이 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 세계야구클래식(WBC) 4강, 2009 세계야구클래식 준우승, 그리고 2015 프리미어12 우승. 특히 세계야구클래식을 통해 그가 한국 야구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였다. 8년 만에 다시 세계야구클래식 대표팀을 이끌게 된 김인식 감독은 인터뷰에서 “대표팀 경기를 여러 번 치르다 보니 전력 외 다른 변수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코칭스태프와 선수 간 믿음과 신뢰가 (기적과도 같은) 변수를 만들어내고는 했다”고 돌아봤다. “야구다운 야구는 감독과 선수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세계야구클래식을 “배움의 장”이라고 표현하는 김 감독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1회 WBC 4강, 2015 프리미어12 우승 등
성인대표팀 최고 경험치 갖춘 명감독
메이저리그 비협조 등 악재 겹쳤지만
“야구다운 야구는 믿고 신뢰하는 것”
“멋모르고 나갔던” 2006 WBC 1회 대회
6승1패 거두며 4강, “90점 주고 싶다”
일본과 5차례 맞붙은 2009년 2회 대회
한·일 결승전 10회 패배 뼈아픈 기억
서막
2006년 세계야구클래식이 열리기 전까지 야구엔 ‘세계 챔피언’이라고 불릴 만한 대회가 없었다.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 들어 있었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아 ‘올림픽 챔피언=야구 챔피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어려웠다. 축구 월드컵을 모델 삼아 2005년 세계야구클래식이 탄생한 배경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 개최 시기는 3월로 정해졌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양해영 사무총장은 “세계야구클래식은 메이저리그에서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먼저 제안했다. 프로 리그가 활성화돼 있는 한국과 일본에 의견을 물어보면서 한국도 주도적으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세계야구클래식의 핵심은 ‘프로 선수 참가’였다.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진짜 야구 대결, 그것이 세계야구클래식의 본질이었다. 김 감독의 나이 60살, 그 또한 세계 야구에 처음으로 도전장을 냈다.
1막1장
김인식 감독은 세계야구클래식 초대 대회를 두고 “멋도 모르고 나간 대회”였고 “한없이 높게만 봤던 대회”라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데릭 지터, 스즈키 이치로,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세계 야구무대를 주름잡던 당대 최고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그나마 일본 프로 선수의 경우 한·일 슈퍼리그 등을 통해 겨뤄볼 기회가 있었으나 현역 메이저리거와의 대결은 사상 처음이었다. 김 감독은 “야구 중계로만 접했던 대선수들과의 싸움이었다. ‘메이저리거’ 하면 부러우면서도 높이 평가하던 때였으니까 처음에는 ‘과연 이들을 상대로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한국도 드림팀을 꾸렸다.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최희섭(LA 다저스),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종범(KIA), 이병규(LG) 등 한·미·일 프로리그에 흩어져 있던 최정상급 선수들이 모였다. 김 감독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대거 포함돼 일단은 투수가 안정됐다고 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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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이 2006년 3월5일 도쿄돔 구장에서 열린 세계야구클래식(WBC) 일본전에서 8회초 역전 투런 홈런을 치는 모습. 도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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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2-1장
6승1패. 일본과 미국 등을 꺾고 6전 전승으로 4강에 올랐지만 준결승전에서 일본에 0-6으로 패하며 한국의 세계야구클래식 첫 여정은 끝났다. 세계 야구를 놀라게 하기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김 감독은 그래서 2006 세계야구클래식 대표팀에 “90점”을 매긴다. “처음 나가서 당당하게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장면 셋은 아직도 생생하다. 1라운드(일본 도쿄돔) 일본전 9회말 2아웃에서 박찬호가 이치로를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냈을 때, 8강(미국 에인절 스타디움) 미국전에서 4회말 4번 타자 김태균 대신 대타로 들어선 최희섭이 3점 홈런을 터뜨렸을 때, 그리고 준결승전 7회초 김병현이 일본 대타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했을 때다. 김 감독은 “준결승전 때는 감독으로서 경기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 후쿠도메에게 홈런을 맞는 순간 ‘아차’ 싶었다. 등골이 싸~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1라운드 일본전 8회초 역전 투런 결승포 등 5개 홈런(부문 1위)을 적시 적소에 터뜨렸던 이승엽이나 마무리 투수로 “예상외의 활약”(김인식 감독)을 보여준 박찬호(3세이브·부문 1위)는 김 감독이 꼽는 투타 수훈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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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2-2장
2006 세계야구클래식 대표팀 팀타율은 0.240(7경기)이었다. 16개 참가국 중 10위에 불과했다. 오피에스(OPS·출루율+장타율)는 8위(0.700). 그럼에도 한국이 4강 성적을 낼 수 있던 것은 투수력 덕분이었다. 팀 평균자책점이 2.00으로 단연 1위였다. 준결승전 이전까지 치른 6경기에서 상대팀에 단 8점밖에 안 내줬다. 서재응과 손민한, 김선우가 선발에서 버텨줬고 구대성, 봉중근, 정대현, 김병현, 오승환 등이 박찬호와 함께 불펜을 책임졌다.
투수 운용의 묘를 살린, 한 박자 빠른 투수교체가 주효했다. 선취점을 주더라도 마운드에서 추가 실점 없이 버티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 그것이 김인식 감독 야구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불펜투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김 감독이 이끈 두산 베어스가 2001년 10승대 투수 한명 없이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던 비결이기도 했다. 김인식 감독은 “야구는 결국 투수놀음”이라며 “투수교체 때는 데이터와 감을 본다. 상대 타자의 성향도 따져야만 한다”고 했다.
1막 에필로그
2006년 3월5일 도쿄돔 1라운드 일본전. 이승엽은 경기 전 김인식 감독에게 대뜸 “홈런을 치면 얼마를 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일본에서 연봉 2억엔(20억원)을 받는 선수가 감독에게 ‘상금’을 바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김 감독은 “2만엔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8회초 1사 1루. 그날 3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던 이승엽은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1-2로 끌려가는 경기를 뒤집는 호쾌한 우월 투런포를 터뜨렸다. 경기 뒤 득의양양해진 이승엽은 김 감독을 보챘고 결국 김 감독은 가방을 뒤져 200달러를 이승엽에게 쥐여줬다. 둘만의 약속을 몰랐던 그날의 세이브 투수 박찬호가 눈을 흘기며 “저는 왜 안 주세요”라며 따졌으나 김 감독은 “박찬호에게는 끝까지 안 줬다”.
2막1장
2009 세계야구클래식은 “(1회 때) 한번 봤으니까 한결 편해진 대회”(김인식 감독)였다. 1회 대회 때 미국, 일본 등과 대등하게 겨뤘던 게 큰 자산이 됐다. 김 감독은 “1회 대회를 치르고 나니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김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다시 잡기까지는 부침이 심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김성근)도, 올림픽 금메달 감독(김경문)도 대표팀 사령탑을 고사했다. 결국 김 감독은 ”나라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는 말과 함께 대표팀을 다시 맡았다.
대표팀 면면은 3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의 영향으로 국내파들이 대거 포함됐다. 해외파는 임창용(야쿠르트), 추신수(클리블랜드) 둘뿐이었다. 부상과 은퇴 등으로 1회 대회 4강 주역들 중에는 단 7명만 대표팀에 재합류했다. 이대호·김태균·정근우·추신수 등 ‘82년생 라인’이 대표팀 전면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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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왼쪽)과 이진영이 2009년 3월17일(현지시각)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09 세계야구클래식 2라운드에서 일본을 꺾은 뒤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고 있다. 샌디에이고/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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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2장
이상한 대회 일정 탓에 일본전의 연속이었다. 결승전까지 5차례나 일본과 맞붙었다. 힘의 세기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2006 세계야구클래식(일본전 2승1패)을 치르면서 한국은 일본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터다. 김인식 감독은 “(70년대) 선수 시절에는 일본이 당연히 세다고만 느꼈다. 와세다대학, 게이오대학 등과 교류전을 하고는 했는데 그나마 한일은행, 크라운맥주 등만이 비등한 경기를 했고 나머지는 거의 상대가 안 됐다”며 “선수와 감독으로 일본을 마주할 때의 느낌은 다르다. 일본이 여전히 세기는 세지만 경기는 해봐야 안다”고 했다.
1라운드(도쿄) 7회 콜드패(2-14)와 도쿄돔 심장부(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아 넣었던 1·2위 결정전(1-0). ‘봉의사’(봉중근)와 ‘국민노예’(정현욱)를 탄생시키고 전 국민을 야구홀릭으로 만든 한·일전 최고 하이라이트는 결승전이었다. 8회초까지 1-3으로 끌려갔던 한국은 포기하지 않는 야구로 8·9회 연속 득점하며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운명의 연장 10회초 2사 2·3루에서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2타점 중전 안타를 허용했다. 김인식 감독은 “1루가 비어 있어 (고의4구로) 걸렀어야 했는데 감독 미스”라고 했다. 아쉽게 우승을 놓쳤지만 김 감독은 1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90점”의 점수를 매긴다. “전체적으로 경기 내용이 모자랐기 때문에 10점은 빼겠다”고 김 감독은 설명했다.
2막 에필로그
야구 국가대표팀이 그들만을 위한 전세기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한 것은 2006 세계야구클래식 때가 처음이었다. 조직위원회는 선수들을 전부 비즈니스석에 앉히기 위해 이코노미석 일부를 떼내 비즈니스석으로 바꾸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선수단 버스가 그대로 공항 활주로로 진입해 비행기에 탑승하는 ‘특혜’도 누렸다. 2009 세계야구클래식 때는 선수들의 이동 때 사이드카가 등장했다. 샌디에이고에서는 사이드카 2대, 경찰차 1대였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사이드카 14대의 호위를 받으며 신호등을 그대로 통과했다. 선수들은 물론 김인식 감독도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김 감독은 “뭔가 대우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야구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막 프롤로그
세계야구클래식이 메이저리그 주도하에 만들어진 반면, 2015 프리미어12는 일본 리그에 의해 창설됐다. 2020 도쿄올림픽을 의식한 쇼케이스나 다름없었다. 참가 선수들 면면은 세계야구클래식보다 떨어졌다. 메이저리그 트리플 A급 선수들 위주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은 리그 톱 선수로 팀을 구성했다. 한국은 원정도박 파문과 부상 등으로 대표팀 구성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미어12를 통해 2009 세계야구클래식 이후 6년 만에 성인 대표팀을 이끈 김인식 감독은 전혀 녹슬지 않은 벤치 운용 능력을 선보였다. 실점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작전이 매번 주효했다. 일본과의 준결승전 9회 대역전극도 그렇게 연출됐다. 김 감독은 “믿음과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선수 자신도 벤치를 보면 믿음이 가야 한다”며 “뒤지고 있어도 벤치에서는 뒤집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줘야만 한다. 그게 보이지 않는 연결의 끈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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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표팀 감독이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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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1장
성인 야구대표팀 경험치로는 이제 김인식 감독을 따라올 지도자가 없다. 부상과 수술, 그리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비협조로 2017 세계야구클래식 대표팀 구성부터가 난항이었지만, 닻은 올라갔고 6일 이스라엘과 1라운드 A조 첫 경기(고척스카이돔)를 치른다. A조에는 한국, 이스라엘을 비롯해 네덜란드, 대만이 포함돼 있다. “대표팀을 꾸릴 때마다 순조로운 게 없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큰일났다’ 싶기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팀워크다. 전력이 떨어질수록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스스로 나서서 서로 양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누가 옆에서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이 없다. 어차피 나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할 길이다.”(김인식 감독)
세계 야구를 향한 그의 도전, 3막이 이제 막 올라갔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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