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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크리스마스~.’ 가시밭길을 걷다가 스스로 꽃길을 만들어낸 최형우(KIA)가 6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 앞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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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FA 100억 시대 최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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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크리스마스~.’ 가시밭길을 걷다가 스스로 꽃길을 만들어낸 최형우(KIA)가 6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 앞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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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1루 주자가 2루로 뛴다. 재빨리 미트에서 공을 빼서 2루로 던졌다. 아뿔싸. 공은 ‘또’ 중견수 쪽으로 굴러갔다. 2루수도, 투수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쪽 발로 흙만 찼다. 공을 못 던지는 포수. 한때 그를 괴롭히던 트라우마였다. “연습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총알 송구가 됐죠. 그런데 경기만 들어가면 그 난리가 났어요. 2루로 정확하게 송구한 게 한 번인가 두 번 정도밖에 안 돼요.”
1루로 수비 포지션을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공이 포수 뒤쪽 백네트 쪽으로 날아갔다. 외야는 더 심각했다. 낙구 지점을 못 잡고 이리저리 허둥댔다. 등 뒤로 넘어가는 공은 아예 잡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제발 타구가 나에게 오지 말았으면…’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의 수비 능력은 평균 이하였다. 하지만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프로 선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올해 자유계약(FA) 100억원 시대를 연 최형우(33·KIA 타이거즈) 얘기다. 프로 입단과 방출, 그리고 재입단과 최고령 신인상, 타격 3관왕에 100억원 계약까지 가시밭길을 걷다가 이젠 꽃길을 걷게 된 그의 야구인생을 3번의 계약으로 돌아본다.
첫 번째 계약-입단
그의 나이 열아홉살 때, 그는 프로 선수가 됐다. 삼성 라이온즈가 2차 6라운드 48순위로 그를 뽑았다. 전주고 3년(1999~2001년)간 성적은 타율 0.313(48타수 15안타) 3홈런 9타점. 전국대회 우승은 없었다.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실력에 대한 의심은 없었지만 딱히 프로로 꼭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야구선수로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었어요. 성취감 같은 것을 느껴본 적도 없고, 프로에 대한 갈망이 없던 거죠. 롤모델도 없었고요.”
야구 유니폼이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던 야구. 중·고등학교 때는 야구 하기 싫어서 도망을 다니기도 했다. 전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이틀 동안 지인의 집에서 칩거하다가 붙잡혀 끌려 내려가기도 했다. 야구선수 이름은 김기태, 심성보 등 전주 연고지인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 선수 정도만 알았다. 전주야구장은 몇 차례 찾았으나 야구 중계는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견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삼형제 중 맏이인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프로 계약금 5000만원. 삼형제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그나마 펴드릴 수 있는 거액이었다. 5000만원은 그렇게 그가 야구를 시작해 처음 번 돈이 됐다.
등번호는 43번. 아마 때는 10번, 22번을 달았는데 프로에서는 그냥 남아 있는 번호를 받았다. 프로 유니폼을 입고 경험한 첫 내야 수비 훈련. 1루에는 양준혁, 3루에는 김한수가 서 있었다. 대선배들 앞에서 열아홉살 새내기의 팔은 그만 얼어붙었다. 공포심마저 엄습하며 공을 제대로 던질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마추어 때는 전혀 이상이 없던 송구. 하지만 프로 들어와서 똑바로 날아가는 공이 없었다. “포수도 보고 1루수도 보고 그랬는데 엉망이었어요.” 실수가 반복될수록 심리적 부담감 때문인지 송구가 더 나빠졌다. 주위에선 “어깨가 고장 났다”며 수군댔다.
그래도 방망이는 곧잘 쳤다. 2004년 타율 0.287에 이어 2005년에는 2군에서 처음으로 3할 타율(0.322)을 기록했다. 그래서 방출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즌이 끝날 즈음이었어요. 그날이 방출 명단이 나오는 날이었는데 다른 동료들은 오후 5~6시 즈음에 전화를 받았어요. 후배들이 팀을 떠난다고 전화를 해와서 위로도 해주고 그랬죠. 그런데 오후 9시 넘어서 2군 매니저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방출 통보를 받고 그저 멍~ 하니 있었어요. 텔레비전을 켜놓고 그대로 앉아만 있었죠. 진짜 앞이 까마득했어요. 마지막에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화면이 지직거리는데도 그렇게 있었어요. 그때는 진짜 인생이 끝난 줄 알았거든요.”
최형우가 방출되기 전 4년(2002~2005년) 동안 1군에서 거둔 성적은 6경기 출전, 7타수 2안타(2루타 2개). 홈런은 하나도 없었다. 같은 기간 2군 성적은 타율 0.291(592타수 172안타), 8홈런 85타점이었다. 4시즌 동안 2군에서도 홈런을 한 시즌 평균 2개꼴로 칠 정도로 파워는 약했다. 최형우는 “그때는 타성에 젖어 있었다”고 반성한다.
19살에 5000만원 받고 프로 데뷔
4년만에 날아든 ‘방출’ 통보
신생팀 경찰청 야구단에 지원
오른팔에는 어머니·동생 이름 문신
어렵사리 잡은 두번째 프로 생활
만25살 나이로 최고령 신인상 수상
9년간 삼성 4번 타자로 자리 굳혀
FA 최고액으로 내년엔 기아 유니폼
두 번째 계약-재입단
2007년 가을 경찰청 야구장 앞, 삼성 관계자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2년 만에 그는 다시 라이온즈 선수가 됐다. 연봉은 입단 때 받은 계약금과 똑같은 5000만원. ‘무적 상태’의 그에게 다른 구단들도 접촉해 왔으나 “프로 생활을 시작한 곳에서 성공하고 싶어” 삼성과 계약했다. “등번호는 34번으로 바꿨다. “메이저리그를 보면 왼손 거포들이 25번, 34번 등을 달았더라고요. 25번은 당시 배영수 선배가 달고 있어서 데이비드 오티즈(다비드 오르티스·보스턴 레드삭스·은퇴)의 배번인 34번을 고르게 됐어요. 어릴 때 야구선수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경찰청 제대를 하면서 큰 꿈을 갖게 된 거죠.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도 있었어요.”
34번은 그의 ‘진짜’ 프로 생활을 위한 마음가짐이었다. 열정이라는 것이 생긴 것도 그즈음이다. 등번호 34번은 그의 오른팔에 어머니, 동생들 이름과 함께 문신으로 새겨져 있기도 하다.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하면서도 그는 34번을 단다. “번호에 너무 애착이 생겨서 바꿀 마음이 없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34번은 그가 맨 처음 삼성에서 달았던 43번을 뒤집은 숫자다. 등번호처럼 그의 야구인생도 180도 바뀐 셈이다. 인생역전, 경찰청 야구단 입단이 그 출발점이었다.
삼성에서 방출되고 막노동 등 소일거리를 하던 그는 ‘밑져야 본전’ 식으로 그해 처음 창설된 경찰청 야구단에 지원서를 냈다. 구단에서 방출당한 선수가 합격하기에는 어려워 보여서 꾀를 내 경쟁률이 낮았던 포수로 지원했다. 다행히 실기 테스트는 문제가 없었다. 실전 경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도 똑바로 날아갔다. 하지만 감독을 속였다는 무거운 마음에 합격 뒤 그는 김용철 당시 경찰청 감독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저 사실 포수 못합니다….” 다행히 김 감독은 그런 그를 이해해줬고 경찰청에서 외야수로 변신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외야 수비는 시련 그 자체였다. 스스로도 “가관이 아니었다”고 말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대신 방망이는 불을 뿜었다. 2006년 타율 0.344를 기록했고 2007년에는 타율이 0.391까지 올랐다. 홈런 개수도 비약적으로 늘어나 2006년 11개, 2007년 22개를 기록했다. 타격 정확성과 장타력을 갖춘 왼손 거포로 거듭난 것이다. 2007년 2군에서 7관왕(도루 제외 타격 전분야)에 오른 그는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야구 시작 뒤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비록 2군 기록이었지만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제 1군에서 붙어볼 수 있겠구나 싶었죠.”
세 번째 계약-FA
“미쳤던 거죠.” 그의 말마따나 신참내기(비록 중고신인의 신분이었으나)로는 돌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2008년 4월1일, 2-2로 팽팽하던 10회초 1사 1루에서 엘지 투수 정재복을 상대로 우월 투런포를 날린 직후였다. 재계약 뒤 첫 시즌 4타석 만에 터뜨린 안타가 결승홈런이었으니 오죽 기뻤을까. 경기 뒤 인터뷰에서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호기가 나왔을까. 그는 사실 놀이기구도 못 타고 번지점프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겁 많은(?) 거포인데 말이다. “프로 데뷔 첫 홈런이기도 해서 너무 기뻐서 혼자 들떴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오버한 것 같아요.”
하지만 거짓말처럼 ‘최형우’라는 이름은 이후 야구팬들의 뇌리에 천천히 스며들어 갔다. 타율 0.276, 19홈런 71타점. 데뷔 6년 만에 만 25살의 최고령 나이로 신인상을 받았고 억대 연봉자(1억원) 반열에도 올랐다. 2011년에는 홈런 1위(30개), 타점 1위(118타점), 타율 2위(0.340)의 성적을 내면서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최형우 자신도 야구인생 처음으로 겪는 우승이라 “이래서 다들 우승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구나” 싶었다. 그는 2008년부터 올해까지 단 한번도 풀타임 주전을 놓치지 않았다.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그사이 전주 어머니께 집도 사드렸다.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만 하셨다. “그때 감회가 남달랐어요. 우리 집도 이제 안정감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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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최형우. 기아 타이거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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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는 지난달 자유계약 신분으로 기아와 총액 100억원(계약금 40억원, 연봉 15억원)에 계약했다. 에프에이 사상 최초의 세자릿수 계약이다. 2015년 초 “120억원을 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120억원을 받을 수 있는 가치있는 선수가 되자”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장적 가치로 보면 당시 그의 다짐이 결코 헛된 꿈은 아니었다. 2004년 심정수(현대→삼성)가 총액 60억원의 계약을 이끌어낸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 수치로 비교해 보면 2004시즌 프로야구 총관중은 233만1978명(평균 4383명)이었으나 2016년에는 833만9577명(평균 1만1583명)으로 늘어났다. 시장 규모가 3배가량 확장됐고 구단의 수익구조도 그만큼 늘어났다. 몸값 거품 논란이 있지만 해당 선수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아직 통장으로 들어온 돈이 없기 때문에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스스로 100억원의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 뿌듯하다. 송구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해 스프링캠프 때마다 수비 코치의 도움을 받으며 ‘나머지 훈련’을 한 보람도 느낀다. “이젠 외야 수비 때 내 수비 범위 안으로 날아오는 공은 다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지난 9년간 큰 부상 없이 삼성 4번 타자로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데 따른 자부심도 느낀다. “23살 때 방출되고 악착같은 면이 생겼어요. 소극적인 성격도 바뀌었죠. 사실 경기 끝나고 숙소 돌아가면 많이 아플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절대 운동장에서는 내색하지 않았고 경기는 절대 빠지지 않았죠. ‘나 자신하고는 타협하지 말자’는 최면을 계속 걸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 자신한테 약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죠. 다시는 내쳐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난 17일 괌으로 출국해 개인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최형우는 2017 세계야구클래식(WBC) 대표팀 소집 때문에 내년 1월9일 잠시 귀국한다. 이후 20일께 기아의 스프링캠프지인 일본 오키나와로 조기 출국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경기에 나서야 하고 바뀐 팀 적응도 해야만 한다. 그래도 지금은 “설렘 80, 부담 20의 상태”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님 밑에서 기아 선수들과 즐겁고 재미있는 야구를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최형우의 오른팔에는 ‘타인을 의식하지 말자’는 글귀(문신)가 새겨져 있다. 혹독했던 23살의 가을(방출)을 경험한 뒤 오직 앞만 보고 직진 인생을 살아왔던 그다. 가끔씩 오해를 사는 그의 직설적인 말투도 이에 기인한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진 2017년, 최형우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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