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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말린스 스즈키 이치로가 6월16일(한국시각)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경기에서 9회 타석에 들어서기 전 더그아웃에서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다. 이날 이치로는 2개의 안타를 기록하면서 미·일 통산 4257개의 안타로 피트 로즈의 통산 최다 안타 기록(4256개)을 넘어섰다. 샌디에이고/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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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일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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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말린스 스즈키 이치로가 6월16일(한국시각)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경기에서 9회 타석에 들어서기 전 더그아웃에서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다. 이날 이치로는 2개의 안타를 기록하면서 미·일 통산 4257개의 안타로 피트 로즈의 통산 최다 안타 기록(4256개)을 넘어섰다. 샌디에이고/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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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카운트 3(볼)-0(스트라이트).
스즈키 이치로가 경기 전 타격 연습 때 항상 머릿속에 그리는 볼 카운트이다. 3(볼)-0(스트라이크)은 타자가 가장 유리한 볼 카운트로, 상대 투수가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공을 던질 수밖에 없다. 염경엽 넥센 히어로즈 감독은 “항상 자기 볼, 자기가 원하는 구종을 치겠다는 것”이라며 “많은 선수들이 자기가 가장 잘 칠 수 있는 존을 잘 모르는데 이치로는 정립이 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준비를 위한 준비. “내일도 경기하기 위해 오늘 준비한다”는 이치로의 야구 열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메이저리그 통산 3000안타 눈앞에
1973년생 스즈키 이치로는 현재 43살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여전히 현역선수로 뛰고 있다. 시즌 타격 성적은 20~30대 선수들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7월1일(한국시각) 현재 타율 0.342(155타수 53안타). 일본 기록(1278안타)과 합해 이미 피트 로즈가 보유하고 있는 야구 역대 최다 안타(4256개) 기록은 넘어섰다. 일본 성적 인정 여부에 이견이 갈리지만 이치로가 야구 역사상 안타를 가장 많이 생산해내는 선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치로 본인은 “통산 성적이나 명예의 전당 등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올해 성적, 그리고 지금의 경기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지금 세계 야구 역사의 한가운데 있다. 앞으로 12개 안타(7월1일 기준)를 더 때려내면 메이저리그 사상 30번째로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는다. 3000안타-500도루-통산 타율 3할(0.300) 이상으로 기록을 좁히면 이치로는 역대 4번째 선수가 된다. 이치로는 “덩치 큰 선수들의 세계에서 그저 평범한 체구(180㎝·77㎏)의 선수도 세계 야구 기록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야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늘 말해왔다.
‘야구 선수’ 이치로를 완성하는 것은 ‘루틴’(같은 행동 규칙)이다. 미국·일본 언론에 소개되고 이치로 본인이 말하는 그의 루틴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 경기 시작 5시간 전에는 경기장에 들어간다.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타격 준비를 한다. 비가 올 때도 똑같다.
▶ 타격 연습 때는 늘 볼카운트를 ‘3(볼)-0(스트라이크)’으로 생각한다. 배팅 훈련 때 투수들이 외야에서 뜬공을 잡으려고 할 때면 ‘저리 비켜라’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 타격할 때는 쪼그리고 앉았다가 어깨를 들고 플레이트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방망이를 쥔 오른팔을 투수 쪽으로 뻗고,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잡는다.
▶ 더그아웃에 있을 때는 1인치 나무 막대기로 발바닥을 문지른다. “발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는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낀다.
▶ 시즌 시작 전 마라톤 선수처럼 각 지점(일정)에서 해야 할 것을 세밀하게 짠다. 다달이 목표가 다르다. “쉽지 않은 목표를 세우기는 하지만 과대목표는 아니다.”(이치로)
▶ 매일 아침 같은 음식을 먹는다. 한때는 카레였고, 한때는 식빵과 국수였다.
“나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이치로는 마치 수도승처럼 24시간 루틴 안에서 생활해 왔다. 강한 자기 확신과 인내심으로 흔들림 없는 길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꿈’이라는 제목의 작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의 꿈은 일류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연습에는 자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365일 중 360일을 강도 높게 훈련하고 있다. 계약금 1억엔 이상을 받고 주니치 드래건스나 세이부 라이언스에 입단하겠다.”
훈련 중독은 여전하다. 뉴욕 양키스 시절 팀 동료인 C.C 사바시아가 “이치로는 시즌이 끝난 다음날하고 크리스마스만 쉬고 매일 훈련한다”며 혀를 내두르자, 이치로는 “마흔 살 넘으면서 달라졌다. 하루 더 쉬고 있다”고 웃으며 되받아친 적이 있다. 1년 365일 중 3일을 제외하고 362일을 훈련한다는 얘기다. 이치로는 그런 삶을 30년 넘게 유지해 왔다.
체구가 작아서 비록 자신이 바랐던 주니치나 세이부에 입단하지는 못했으나 이런 부단한 노력 덕에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펄로스)에 입단한 뒤 7년 연속(1994~2000년) 타격왕에 올랐고 메이저리그 최초 10시즌 연속 200안타(2001~2010년),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262개·2004년)을 세울 수 있었다. “타석에서는 최대한 마음을 비우려고 한다. 냉정하게 방망이만 돌리는 타격 기계가 되는 것이다. 감정이나 몸 상태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온전히 타격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매일 훈련을 하다 보면 실밥까지 보이게 되고 실밥의 어떤 부위를 때려야만 내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날릴 수 있을지 알게 된다. 그게 내가 냉혹하게 훈련하는 이유다.”(이치로)
43살 나이에도 뛰는 현역선수
역사상 안타 가장 많이 친 선수
볼 카운트 3-0 상상하고 배팅연습
선글라스 끼고 TV 시청하는 등
수도승처럼 24시간 ‘루틴’ 생활
특수제작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
“유연성이 나에게 힘을 준다”
홈에서 1루까지 3.7초 주파 준족
김성근, “발상 자체가 다르다 ”
“50살까지 야구하겠다” 공언
“그라운드를 캔버스로 만드는 아티스트”
우투좌타인 이치로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타격 이론을 이미 세웠다”고 말한다. 2001년 메이저리그 진출 뒤 일본에서는 접해보지 못한 빠른 공에 대응하기 위해 타격할 때 오른 다리를 드는 것(레그킥)을 없앴을 뿐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치로를 “그라운드를 캔버스로 만드는 아티스트”라고도 표현한다. 자유자재로 공을 날리면서 야구, 그 이상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일부 전문가는 이치로의 타격 모습을 테니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시애틀 매리너스 존 모지스 1루 베이스코치는 “이치로는 손에 테니스 라켓을 쥔 것처럼 타격을 하는데 마치 서브 에이스를 기록하려는 듯 유격수 머리 쪽으로 타격을 날린다”고 말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리 젱킨스 기자의 견해도 비슷하다. “이치로는 테니스에서 다운더라인을 할 때처럼 공을 깎아 친다. 발리처럼 칠 때도 있고 수비가 앞쪽으로 당겨 서 있을 때는 수비수 뒤로 떨어지는 드롭볼을 칠 때도 있다. 톱스핀 드라이브를 날릴 때도 있다. 공을 예측한 곳으로 정확히 날리는 능력이 있으며 타격 때마다 다른 테크닉을 사용한다.”
이치로는 빠른 배트 스피드와 함께 빠른 발로도 유명하다. 2004년 기록한 262개 안타 중 54개가 내야안타였을 정도로 짧은 내야 타구에도 1루에서 세이프 되고는 했다. 어떤 시즌에는 내야안타 비중이 27~28%에 이르기도 했다. 한데 정작 스스로는 “특별히 발이 빠르지는 않다”고 말한다. “단지 테크닉”이라는 것이다. 이치로는 “왼손 타자이고 타격할 때 타자 박스에서 투수 쪽으로 더 붙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홈 플레이트에서 1루까지 3.7초에 주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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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된 이치로의 개인 트레이닝 모습. 월스트리트 저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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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선수 시절 일본 스프링캠프 때 오릭스 선수였던 이치로를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염경엽 감독은 “훈련 방법부터 시작해서 준비가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돌아본다. “하루는 이치로가 실내연습장에서 변화구 콘택트를 연습하고 있었다. 기계로 공 빠르기를 조절해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속구 타이밍에 나갔다가 변화구를 콘택트 하는 것을 계속 같은 방법으로 끊임없이 했다. 기계 속도를 시속 150㎞로 올려 놓고도 아주 편하게 쳤다. 연습 방법이나 연습량이 남달라서 ‘나중에 코치가 되면 후배들을 이치로가 하는 것처럼 가르쳐야지’ 싶었다.” 염 감독은 은퇴 뒤 이치로와 관련된 일본 책을 손수 구해 지인에게 번역을 부탁한 뒤 타격 요령 등을 따로 정리해뒀다. “이치로의 타격 이론을 보면 획기적인 것이 많다. (왼손타자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를 빨리 닫아라’라는 식이 아닌 ‘모든 중심을 왼쪽 어깨에 맞춰라’라는 식으로 선수들에게 단순하고 간단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타격 이론이 많다.”
이치로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기구로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 등의 보도에 의하면 이치로는 비시즌 겨울 일본 호텔에서 묵을 때 호텔 창고를 개인 트레이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뒤 특수제작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훈련한다. 일반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는 기구별로 특정 부위만 강화되게 설계돼 있으나 이치로가 사용하는 특수 트레이닝 기구는 야구를 할 때 사용되는 어깨, 골반, 엉덩이 쪽 근육을 한꺼번에 단련시킬 수 있다. 일본 기업인 월드윙 엔터프라이즈에서 제작한 이치로만을 위한 맞춤 설계용 트레이닝 기구라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트레이닝 기구는 근육의 이완과 긴장을 반복시키면서 유연성을 증가시켜 몸의 동작 반경을 넓혀준다”고 했다. “38살 이치로의 몸에 체지방이 6%에 불과했던”(시애틀 매리너스 트레이너) 이유라고 하겠다.
이치로는 “한때는 몸무게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의 잠재된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이제는 안다”며 “나는 유연성이 나에게 힘을 준다고 믿는다. 유연성이 나의 무기”라고 했다. 미국 집과 일본의 그의 부모 집, 그리고 경기장에도 개인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를 설치해 하루 3차례 운동을 한다. 이치로는 “지난해 어땠는지는 지금 기억하지 않는다. 해마다 (변화하는) 내 몸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게 내가 프로 선수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50살까지 야구를 하겠다”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자기 관리 때문이다. 이치로는 2001년부터 2012년까지 12년 동안 단 한 시즌(2009년·146경기)만 제외하고 매 해 157경기 이상(전 시즌 162경기) 출전했다.
“한 베이스 더 가는 것 갈구해왔을 뿐”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은 “이치로는 철학자”라고 정의한다. “발상 자체가 다르다”며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안에서 움직인다. 신념이 확고해서 옆에서 보면 ‘미친놈’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일(야구)의 긍지를 쫓아다닌다”고 했다. 실제로 이치로는 극한, 극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메이저리그에서 교타자가 살아남는 법을 보여줬다. 자신이 세운 목표에는 물음표를 달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타격왕 등 남들이 한때 비웃은 목표도 기어이 달성해 냈다. 확실한 야구 철학을 갖고 야구에 대한 헌신과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임의적이고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정하는 것 아니냐.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겉치레일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 아무리 훌륭한 타자여도 타석에서 10번 중 7번은 실패한다. 나는 여러 차례의 실패를 거치면서 좀 더 나은 타자가 되기를 원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타격 천재라고 부르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부상을 당하지 않아 계속 경기에 출전해 왔고 늘 한 베이스 더 가는 것을 갈구하면서 야구를 해왔을 뿐이다. 나는 그저 특별한 하루 없이 매일을 똑같이 살아가면서 연습처럼 경기하고 연습처럼 경기를 끝낸다. 그렇게 하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하고 준비를 한다. 나는 과거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내가 달성할 것들 때문에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그게 나의 삶의 모토다.”(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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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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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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