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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FC의 골잡이 정조국이 지난 3월12일 포항 스틸러스 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포항과의 원정 개막전에서 골을 넣은 뒤 손가락에 키스를 하는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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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광주FC 골잡이 정조국
케이티엑스(KTX) 목포행 2시간30분, 광주보다 멀다.
거리감은 상대적이다. 시간도 심리에 따라 다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선수도 있다. 서울 한남동 집에서 경기도 구리 챔피언스파크까지 20분이면 족했다. 그러나 인생에 순풍만 불 수는 없다. 역풍이 불어야 바람개비는 더 빨리 돈다. 좌절을 통해서 더 전진할 동력을 얻는다. 광대뼈가 두드러진 푸석푸석한 얼굴. 기름기 제로의 이 사나이가 웃는다. ‘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과장일까.
프로축구 K리그 광주FC의 정조국. 대신고 시절 한 시즌 4개 대회 득점왕, 2002 한일월드컵 히딩크 사단의 유일한 고교생 연습생, 명문 FC서울의 10년 ‘원클럽 맨’, 그리고 프로 278경기 88골의 특급 골잡이. 이력으로나 유명세로나 대한민국 희귀종이다. 그가 광주FC로 갔다. 전용 훈련장도 없어서 광주가 아니라 목포국제축구센터에서 생활한다. 주변의 도로, 야산 개발공사 풍경까지 낯설다. 완전한 클럽 시스템을 갖춘 아차산 자락의 FC서울 구리 챔피언스파크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정조국은 없다. 오로지 운동, 경기, 휴식만 생각한다. 차라리 여기가 좋다.”
축구선수한테는 무엇이 필요한가. 부귀영화는 아니다. 돈은 먹고살 정도로 벌었다. 축구선수의 생명줄은 그라운드다. “축구 잘 아시죠. 정말 사랑합니다. 그라운드 안에서 인정받고 싶고, 경기장에 나가서 축구를 하고 싶다는 그 생각 하나였습니다.” 생명은 벤치에 앉을 때 단축된다. 11명의 선발을 제외하고 7명의 후보를 위한 벤치에라도 앉으면 희망은 있다. 어떤 때는 그 자리도 못 메워 스탠드에서 지켜봐야 한다. 그 심정은 축구선수 아니면 모른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화려한 프로선수의 이면엔 어두운 구석도 있다. 후보선수들은 정말 죽을 맛이다. 감독을 슬슬 피하게 되고, 심지어 고기 먹을 때는 눈치가 보인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내 인생 처음 가장 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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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국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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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갈현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축구.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2015년 난생처음 비애가 몰려왔다. 악몽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K리그 11경기에 출전했는데, 그 가운데 10번을 교체당하거나 교체로 나갔다. 득점은 딱 한 골이었다. 후반기에는 아예 18명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 태하(6)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나와 자주 응원을 했다. 그런데 그해 가을 다섯살 태하가 묻는다. “아빠는 왜 안 뛰어?” 가슴을 망치로 맞는 듯했다. “할 말이 없었다.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때 뛸 팀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FC서울은 모든 선수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꿈의 팀이다. 대한민국 대표도시 서울은 교육부터 쇼핑, 문화생활까지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인 선수들이 지방 팀보다는 수도권 팀을 좋아하는 이유다. 행여 남편이 지방 팀으로 이적한다고 하면 아내가 말려 못 가는 경우도 있다. 지에스그룹의 지원에 힘입어 FC서울에는 잘 뛰는 선수가 넘쳐난다. 2016년 FC서울의 공격진은 축구 천재과인 박주영과 동급의 동물적 골잡이 아드리아노뿐만 아니라 K리그 득점왕 출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데얀까지 최강으로 이뤄졌다. 축구 격언에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최용수 서울 감독이 현란한 카드를 놔두고 정조국을 쓸 것 같지도 않았다. 2003년 데뷔(당시 안양 엘지) 이래 해외진출(2011~12)과 군복무(2013~14)를 제외하고는 쭉 서울에서만 뛴 정조국이 광주로 이적하게 된 것을 두고 “내 인생 처음 가장 큰 결정이었다”고 한 이유다.
프로축구는 냉정하다. 매몰차고 가차 없다. 오직 몸뚱이의 가치만이 생사를 결정한다. 그 몸값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정조국은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깨달음이 늦게 왔습니다. 좋아하는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더 치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정조국의 강점은 슈팅이다. 축구선수가 만날 하는 게 슈팅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하지만 축구 전문가들은 정조국의 슈팅이 매우 특별하다고 말한다. 대신고 시절 은사인 최기봉 감독은 “야구에서 선동열의 돌덩이 강속구를 생각하면 된다. 공을 맞히는 임팩트 속도가 아주 좋아 공이 강하다. 골키퍼들은 정조국의 공을 껄끄러워한다”고 했다. 안양 엘지 시절 정조국을 프로 마인드로 무장시킨 조광래 대구FC 대표이사는 “골문만 보이면 발목을 꺾어 때리는 슈팅 기술이 엄청나다. 공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득점을 많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스트라이커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타고났다.
278경기 88골의 특급 골잡이
지난해 후반기엔 18명에도 못 들어
“아빠는 왜 안 뛰어?” 아들 질문에
‘꿈의 팀’ 서울 떠나 광주에 새 둥지
“목숨 걸고 뛰어야 한다”는 깨달음
31명 중 10명이 신참인 시민구단
연봉 깎이고 ‘원클럽 맨’ 꿈 접었으나
32살 나이에도 90분 소화하는 체력
시즌 3경기 모두 골 터뜨리며
공격축구 무장해 초반 팬몰이 앞장
3경기 4골, 득점 선두 올라
강력한 슈팅이 발목을 잡은 측면도 있다. 최기봉 감독은 “90분간 뛰게 해주면 무조건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 그만큼 골 결정력은 뛰어나다. 정조국도 “골문 앞에서는 미세한 틈이라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물론 상대 수비수가 빠르기 때문에 골문을 보고 차면 늦게 된다. 시시때때로 머릿속에 골문의 위치를 입력해둔다”고 했다. 하지만 프로에서 매 경기 풀타임을 보장받는 공격수는 전북 현대의 이동국 정도일 뿐이다. 감독과 선수가 초강력 본드처럼 단단한 신뢰로 결합해야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정조국은 움직임이 부족하다는 약점, 세밀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광주FC는 “변화해야 하고, 탈피해야 하는” 정조국한테는 맞춤한 곳일지도 모른다. 광주는 완성된 스타를 영입해 배치하는 FC서울의 운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올해 광주FC 31명의 선수단 가운데 신인은 10명으로 1부팀 가운데 가장 많다. 팀 내 이름을 날린 선수는 정조국, 이종민, 조용태 정도다. 나머지는 2부 출신이 많다. 재원이 부족하니 선수를 키워서 재목을 만들어야 한다. 남기일 광주FC 감독은 “정조국 선수가 우리 팀에 와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말이 ‘압박’이었을 것이다. 우리 팀 형편으로는 일대일에서 이길 수 있는 선수들이 없다. 서로 도와서 공을 빼앗아야 한다. 그런데 두 달 훈련하면서 압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선수가 됐다”고 했다. 물론 공격수의 압박이 사방 군데를 뛰어다니라는 말은 아니다. 전방에서 적당히 선을 잡아주고, 한쪽으로 밀어주거나, 팀 전술에 맞게 움직이면 된다. 분명한 것은 정조국이 더 많이 뛰는 선수가 됐다는 점이다.
연봉도 깎였고, 꼭 이루고 싶었던 원클럽 맨의 꿈도 포기했다. 하지만 얻은 것은 더 크다. 묶어두어 썩게 만들지 않고, 이동시켜 부가가치를 높이는 거래의 윈-윈 속성 때문이다. 남기일 광주 감독은 “4-3-3 전형에서 공격은 원톱인 정조국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전술을 짰다. 정조국한테 공이 연결되면 득점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좌우 날개 공격수로는 송승민, 조성준이 있지만 정조국만큼의 여유는 없다. 기회는 잘 만들어도 부담감 탓에 골로 연결하지는 못한다. 파비오나 주현우도 마찬가지다. 팀의 중심에 선 정조국은 이미 포항 원정, 제주와의 안방전, 수원FC 원정 등 시즌 세 차례 경기에서 모두 골을 터뜨려 득점 선두(4골)에 올랐다. 앞선 두 경기에서는 주간 최우수선수, 주간 베스트 11로 뽑혀 대형 선수의 위용을 과시했다. 남기일 감독은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면 깔끔하다. 사오거나 내보내면 된다. 하지만 가난한 구단에서는 돈으로 만족을 줄 수는 없다. 우리는 선수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고, 뛸 기회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정조국의 절실함과 광주의 유인책이 절묘하게 맞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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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FC의 골잡이 정조국이 지난 3월19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안방 개막전에서 제주 선수들 사이로 공을 몰아 돌파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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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 다 나간 줄로 안다”
현대 축구에서 나이의 한계는 극복 가능한 영역이다. 술, 담배 등에 손대지 않고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하는 게 요즘의 프로선수들이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32살의 나이에도 90분을 소화하는 게 대단하다. 전성기의 몸을 유지하는 것은 젊은 선수들한테도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기술은 새롭게 장착할 수 없고, 몸의 빠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생각이 빠르면 나이가 들어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정조국은 “골을 넣으려면 골대 앞에 가장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패스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최전방에 빨리 도달할 수 있도록 간결하게 한다. 물론 상대의 공격이 자신한테 집중될 경우에 대비한 공격 옵션도 필요하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선수들과 함께 뛰며 가르치는 남기일 감독은 정조국에 집중하는 상대 전술을 역이용해 주변 선수의 득점을 노리는 방법도 반복훈련시키고 있다.
광주에서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 정조국이 광주를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조국은 “모든 것은 변한다. 가치는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K리그에서 펄펄 난다면 프로 100골 고지에 오르고, 슈틸리케 감독의 대표팀에서도 손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국은 “기록엔 관심이 없다” “대표팀엔 좋은 공격수가 많다”며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표팀과의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과거는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 시절 월드컵 경기를 따라다니면서 선배들한테도 많이 배웠다. 항상 월드컵을 생각했지만 인연이 안 됐다. 그런데 팬들은 제가 월드컵에 다 나간 줄로 안다”며 웃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지휘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FC서울의 경기를 지켜볼 때는 희한하게 경기력이 떨어졌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이끈 허정무 감독의 호출 때는 K리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합류하지 못했다. 정조국은 “2008년 월드컵 예선을 위해 소집되기 전날 인천과의 경기에서 안면 골절을 당했다. 골도 많이 넣고 몸이 가장 좋았을 때였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일찍부터 스타덤에 오른 정조국은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지만 중간중간 오해와 고비는 있었다. 성격상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변명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2011년 프랑스 1부리그 오세르에 입단하고, 이듬해 낭시에서 시즌을 마무리한 것은 정조국한테 “가장 좋았던 시절”로 남아 있다. 대표선수가 아닌데도 프랑스 리그에 진출했고, 현지에서도 골은 많이 터뜨리지 못했지만 강등 위기의 팀을 구해내는 등 알토란 같은 활약을 했다. 정조국의 에이전트인 류택형 지쎈 이사는 “병역을 위해 2012년 여름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만약 병역 문제가 없었더라면 선수가 더 큰 동기부여를 갖고 경기를 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올 때 방출돼서 온 것이 아니었는데도 팬들은 못해서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시민구단 광주의 대표상품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순수함에서 나온다. 경찰청에서 복귀한 뒤 FC서울의 주변부로 밀리면서 겪었던 마음고생은 재도약을 위한 보약이 됐다. 늘 겸허하고 긍정적인 마음은 축구 열정 따라 그를 광주로 이끈 힘이다. 벤치에서나 스탠드에서나 그는 팀을 응원했지, 감독을 탓하지 않았다. 아직도 “FC서울 팬들이 주신 사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탤런트 아내인 김성은씨에 대한 생각도 각별했다. “연예계 활동으로 바빠 내조가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정조국은 “여자가 결혼했다고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한다면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면 포기하고 집안일 하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그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고 했다. 혹시 누가 정답을 가르쳐준 것은 아닌가 싶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고 되물었다. “그게 당연한 거 같아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그에게서 돌아온 답이다. 정말 부부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재훈 프로축구연맹 경기감독관은 “연예인 하면 남편의 위상을 많이 걱정할 것 같은데, 이 부부한테는 그냥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평범하게 사는 아내와 남편 같다. 연예인 내조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1부로 승격해 잔류한 시민구단 광주에서 정조국은 대표 상품이 됐다. 끈끈하고 공격적인 축구로 초반 팬몰이는 성공했다. 광주 구단은 정조국 영입 효과를 극대화해 메인 스폰서 찾기 등 마케팅을 확대할 생각이다.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안방경기나 수도권 원정 때는 아들과 아내의 응원까지 받을 수 있다. 정조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해왔지만 지금도 축구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축구는 기술보다는 의지인 것 같다. 사랑해주는 팬들께 늘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9일 열리는 울산과의 안방경기에서 그의 초반 연속골 행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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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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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 김창금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 말이 있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도 아닌 군대였으니, 여자들은 이런 마음을 알까? <한겨레> 스포츠 기자로 1999년 이후 줄곧 축구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마음껏 축구 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꿈을 간직해왔다. 스포츠 경제와 스포츠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김양희의 야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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