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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프로야구 엘지(LG) 트윈스 코치는 “코칭은 선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선수와 같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코치가 4일 오후 경기도 이천 엘지 트윈스 챔피언스파크 기념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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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코치 이상훈
대구 호텔방 공기는 무거웠다. 묵묵히 짐을 챙겼다. 8회까지는 하루 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9회가 ‘내일’을 지웠다. 잔인하고 긴 밤. 대충 짐 정리가 끝난 뒤 밖으로 나가기 전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불과 몇 시간 전, 그에게서 동점 홈런을 뽑아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엽아, 잘 쳤다. 축하한다.”
과연 누가 자신에게 비수를 꽂은 상대에게 축하 전화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풍운의 야생마’라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2002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6차전 9-6으로 앞선 9회말 1사 1·2루에서 이승엽(삼성)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두들겨 맞았다. 이승엽에 이어 마해영이 엘지 바뀐 투수 최원호를 상대로 솔로포를 터뜨리며 한국시리즈는 그대로 삼성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엘지(LG)가 이겼다면 3승3패 동률인 가운데 마지막 7차전을 치를 수 있었다. 지금은 엘지 피칭아카데미 초대 원장이 된 이상훈(45)은 말한다. “당시 내가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그 이상의 능력치는 나한테 없다고 생각했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나나 팀은 진짜 최선을 다한 진정한 패자였다.”
유일했던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
이상훈의 현역 시절, 야구팬들은 그에게서 ‘다르지만 같은’ 모습을 봤다. 긴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로 뛰어나갈 때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마’를 떠올렸고, 일본프로야구, 미국 마이너리그를 누비고 복귀한 다음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당한 뒤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을 때는 ‘풍운아’를 마음속에 그렸다. 은퇴 뒤 홍대 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로커의 모습은 야생마나 풍운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가 야구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놀랐던 이유다. “주변 의식을 안 하고”(엘지 은퇴 선수), “조직 안에 녹아들기 힘든 강한 성격을 가진”(모 구단 코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지도자로 과연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인야구, 여자야구, 그리고 중·고등학교 인스트럭터를 거쳐 2012년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가 됐고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에 이어 작년 말 친정팀 엘지로 돌아왔다. 2004년 에스케이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고 시즌 중반 은퇴를 선언한 뒤 12년 만의 귀환이다. 어린 선수들의 스승이 된 ‘야생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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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밴드의 로커로 활약하던 모습(2005).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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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은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일본(98~99년), 미국(2000~2001년)에서 뛴 시간을 빼면 국내 리그에서 활약한 것이 고작 6시즌 반밖에 안 됐으나 결코 지울 수 없는 강한 흔적을 남겼다. 고려대학교 4학년 때가 그 시작이었다. 이상훈은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성균관대와의 경기에서 14타자 연속 삼진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와 같은 학교를 다닌 강상수 엘지 투수코치는 “집안 사정으로 3학년까지는 방황을 진짜 많이 했다. 하지만 3학년 말부터 야구에 집중했고 그해 겨울부터는 아예 합숙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훈련에만 몰두했다”고 이상훈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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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 투수 시절(1993~97).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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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에 우선 지명되면서 프로 입단한 첫해(1993년) 그는 시속 150㎞ 안팎의 강속구를 앞세워 9승9패 평균자책 3.76의 성적을 거뒀다. 1994년에는 18승(8패·다승 1위)을 올리면서 엘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95년에는 20승(5패) 고지도 점령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는 이상훈이 유일하다. 또한 이상훈 이후 순수 선발승으로 20승을 채운 토종 투수는 작년까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무리투수로 전환한 1997년에는 47세이브포인트(10승 37세이브)를 거두며 구원왕에 올랐다. 이상훈을 빼고 엘지 전성시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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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건스 입단(98~99).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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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에서 선발로 활약하던 시절, 이상훈은 “철저하게 루틴(야구 습관)을 지켰다”. 등판 전날 고기를 안 먹는 것은 철칙이었다. 등판 다음날에는 고기 섭취로 영양을 보충한 뒤 웨이트트레이닝과 러닝을 하고, 등판날이 가까워질수록 운동을 가볍게 하면서 음식 섭취량도 줄였다. 이러한 루틴을 지키기 위해 월요일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진짜 기계처럼 살았다”는 그는 “루틴이 깨지면 내가 아닌 것 같았다”고 했다. 선수 시절을 돌아보면 모든 과정이 ‘준비’였다. 혈행장애, 어깨탈골, 척추분리증 등을 앓았으나 치명적인 부상이 없던 것도 철저한 준비 과정 때문이었다고 그는 믿는다. “감독이 나가서 던지라면 던져야 하는 게 선수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확실한 무기도 하나 갖고 있어야 한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게 프로의 120% 의무 상황이다.” 신념이 생기면 신념대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긴 갈기머리 휘날리던 야생마
일본·미국을 누비던 풍운아
홍대 클럽에서 기타 치던 로커
사회인야구·여자야구 등 거치고
지금은 엘지피칭아카데미 원장
야구란 공 갖고 잘 노는 것,
코칭이란 선수가 공을 갖고
잘 놀게 해주는 것이란다
예전보다 둥글둥글해진 그는
원석 갈아 바위 만들려 한다
“야구는 연극 같은 행위예술”
김성근 한화 감독이 기억하는 이상훈도 다르지 않다. 김 감독은 이상훈을 “자기 원칙을 갖고 사는 아이(김 감독은 모든 선수를 ‘아이’라고 부른다)”라고 표현한다. 김 감독과 이상훈의 인연은 김 감독이 오비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감독이고 이상훈이 서울고 2학년이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이상훈은 아마추어 신분으로 오비의 겨울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 마이너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2002년 4월 국내로 돌아왔을 때 엘지 사령탑도 김성근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이상훈이 엘지에 처음 복귀했을 때 ‘긴 머리 하나만 봐 달라’고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만이 없었고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 어기지 않았다”고 복기했다. 김 감독에게 이상훈은 “미안할 정도로 열심히 던지는” 마무리투수이기도 했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양상문 현 엘지 감독 또한 같은 말을 한다. “감독이나 코치 입장에서 이상훈은 편한 선수였다. 2~3경기 연투해서 피곤하다고 느낄 때도 있을 텐데 ‘괜찮냐’고 물어보면 늘 ‘피곤하냐고 묻지 마시고 저는 준비해서 던지라고 말하면 던지고, 하루 쉬라고 하면 쉬고 던집니다’라고 답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나 책임은 충실하게 이행하는 친구였다.”
팀 후배들이 기억하는 이상훈은 “자신의 투구에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않고 팀플레이를 제일 먼저 강조하는 선배”였다. 이상훈은 2003년 엘지 창단 최초로 투수 신분으로 팀 주장이 되기도 했다. 한 엘지 은퇴 선수는 “팀이 지고 있는데 더그아웃이나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안 좋은 행동을 보였을 때는 경기 뒤 라커룸에 집합시켜 단체 기합을 주기도 했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저돌적이고 즉흥적인 면 때문에 윗사람들하고 충돌은 잦았으나 팀 동료 선수들을 위해서는 발 벗고 나서는 선배”이기도 했다. 메리트 문제로 프런트와 선수단이 대립각을 세웠을 때는 “시상식 및 인터뷰 거부”라는 초강수를 꺼내들었다. 스포츠용품 업체와 후원 문제로 부딪혔을 때는 2군 선수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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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김양희 기자와 인터뷰하는 이상훈 코치. 이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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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타자를 상대할 때 포수가 변화구를 요구하면 불같이 화를 냈던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의 직진 야구 인생. 그는 누구보다 야구를 진실로 대했다. 2004년 초 라커룸 기타 연주로 촉발된 이순철 당시 엘지 감독과의 마찰로 에스케이로 트레이드되고 몇 개월 뒤 곧바로 은퇴 선언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엘지를 상대로 3~4경기 던졌을까. 스트라이프(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지는데 마음 자세가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 해를 넘겨 또 엘지와 마주했을 때는 그런 기분이 무뎌졌을 수도 있는데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1년을 나 자신을 속이면서 야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짜 창피했다.”
그에게 야구란 “공을 갖고 노는 것”이다. “진짜 잘 노는 것.” 그렇다면 코칭은? “선수가 공을 갖고 잘 놀게 해주는 것”이란다. “야구 선수가 진정으로 공을 잘 갖고 놀기 위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배우면서 성취하는 게 있다. 그런 면에서 야구는 연극이나 공연 같은 행위예술일 수도 있다. 몰입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고 또 관중도 감격하지 않느냐.” 그가 음악을 하는 것도 어쩌면 순간의 몰입이 주는 쾌감 때문일 것이다.
넓은 시야 안겨준 여자야구팀 경험
지도자 생활에서 여자야구팀 코치 경험(2011년)은 이상훈에게 더 넓은 시야를 안겨줬다. “이론이 아닌 행위에서 그들의 순수함을 느꼈고”, “돈과 명예가 다가 아닌 ‘진짜 열정’을 배웠다”. 처음에는 “왜 늘 같은 짝하고만 캐치볼을 하는지”, “한 타석만 나가고 왜 경기에서 빠지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으나 그들 또한 다른 식의 야구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과 운동하면서 예상 가능한 야구만 하다가 사회인야구, 아마추어야구를 거쳐 여자야구를 가르치다 보니 예상외적인 것이 튀어나왔다. 일본, 미국 야구를 경험하면서 섬세하고 굵은 야구를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의외적인 상황이 많았다. 그때 야구든 사람이든 깊이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수를 내 그림 안에 넣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분명 선수 때와는 달라졌다. 이상훈을 1년간 지켜봤던 김태형 두산 감독은 “캠프 때 봤는데 어린 선수들과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잘 헤아려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은 “(거칠었던) 예전보다 둥글둥글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훈은 현재 김대현, 유재유, 천원석을 전담해서 가르치고 있다. 3명 모두 열아홉 동갑내기 고졸 신인 투수들이다. 양상문 감독은 “이상훈 코치가 갖고 있는 노하우를 어린 후배들에게 전해주면서 정신력과 기술을 겸비한 강한 선수로 키워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최근 선수들의 투구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강상수 투수코치에게 직접 보내기도 한 이상훈은 “코칭은 선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선수와 같이하는 것”이라며 “코치는 선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4일 오후 경기 이천 엘지챔피언스파크에서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천원석의 이름을 빗대 “‘원석’을 갈아서 ‘보석’을 만들 것이냐”는 물음에 이상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석보다는 단단한 바위가 나은 것 같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파도가 거세도 바위는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킬 테니까.” ‘18.44’(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를 모자에 새긴 그는 여전히 ‘야구’를 한다. 공을 갖고 진짜 잘 놀게 하기 위한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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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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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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