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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일본 오키나와 고친다 구장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한화이글스의 신성현. 1군에서 기록한 안타 수보다 삼진 수가 더 많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한화 이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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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육성 출신’ 한화 신성현
“힘듭니다. 다 힘들어요.”
그의 야구는 항상 힘들었다. 아니, 분명 행복한 시절도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카프에 지명됐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1군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방출됐으니 이 또한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신성현(25·한화 이글스)은 말한다. “매일매일이 힘들죠. 하지만 야구 못한 것 빼고는 좌절한 적이 없어요. 일본에서 잘렸을 때요? 그때도 좌절은 안 했어요. ‘(히로시마 도요카프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이를 악물었죠. 지금은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나는 육성선수다’
2015시즌 개막 전, 프로야구에는 총 256명의 육성선수(군 보류 포함)가 있었다. 규약에 따라 구단은 최대 65명의 선수만 등록할 수 있는데 이들 외 미등록선수가 육성선수로 분류된다. 2014년까지 ‘신고선수’ ‘연습생’으로 불린 육성선수는 5월1일 이후 1군 경기에 뛸 수 있는 정식선수 등록이 가능하다. 퓨처스(2군)리그는 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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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시즌 최종 육성선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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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부터 육성선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는데, 자료 확인이 가능한 2003년과 비교하면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서울 연고 구단의 한 운영팀장은 “2000년대만 하더라도 한 구단당 육성선수가 5명 안팎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마추어 선수들 중 출중한 기량을 뽐내는 선수가 줄어들면서 구단마다 선수를 육성해서 쓰자는 인식이 강해져 지금은 15명 안팎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지명선수라고 해도 일단은 육성선수로 묶어두는 사례 또한 늘었다. 해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10명 정도 뽑는데 기존 선수에서 10명을 방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부를 육성선수로 돌리는 것이다.
육성선수는 프로야구 선수 최저연봉(2700만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신인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가 팀 사정에 의해 육성선수로 분류된 새내기 선수들은 2700만원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2000만원을 받는 선수들도 있다. 월봉으로 치면 200만원을 받는 셈이다. 육성선수는 출전 기회도 등록선수보다 적고 팀 구조조정이 있을 때 제일 먼저 해고 통보를 받는다. 이 때문에 가끔 기회가 왔을 때 온몸으로 부딪쳐 싸우면서 내일을 기약해야만 한다. 야구판 비정규직 삶이 그렇다. (물론 모든 야구선수는 자영업자로 등록돼 있지만.)
올해 1군 등록의 기회를 잡은 육성선수는 모두 29명이었다. 10%의 확률이 조금 넘는다. 나머지 육성선수들 중 일부(17명)는 시즌 중, 혹은 시즌 뒤에 방출됐고 이들의 빈자리는 또 다른 육성선수들(19명)로 채워졌다. 신성현은 맨 처음 256명의 육성선수 명단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선수다. 시즌 도중 육성선수로 등록됐고 1군에도 데뷔했다. 흔하지 않은 경우라 하겠다. 신성현은 어떻게 초스피드로 1군에 데뷔할 수 있었을까.
신성현이 어릴 적 했던 운동은 원래 수영이었다. 5~6년 정도 수영만 했는데 덜컥 비염에 걸렸다. 수영장에 들어가면 숨이 턱 막혔던지라 1년 정도 운동을 쉬어야만 했다. 운동은 하고 팠던 터라 야구 교실에 나갔고 그 뒤 야구의 매력에 푹 빠져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게 초등학교 4학년 말이었다. “아버지가 엘지 팬이어서 저절로 엘지 팬이 됐어요. 유지현(현 엘지 코치) 선수를 너무 좋아해서 등번호도 6번을 달았다니까요.”
뒤늦게 시작한 야구. 실력은 의욕만큼 늘지 않았다. 스스로 “야구 못했어요”라고 할 정도다. “굳이 야구가 아니더라도 일본 문화와 일본어를 익히는 게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집요한 설득에 신성현은 중학교 졸업 뒤 일본 유학을 택했다. 교토국제고에는 한국 출신 선수가 5명이나 있었다.
중학교 졸업 뒤 교토로 야구 유학
4번타자 꿰차며 통산 30개 홈런
히로시마 도요카프 지명받았지만
2군 전전하다가 끝내 방출
그리고 김성근 감독을 만나다
고양원더스 입단한 뒤 무릎 부상
팀 해체로 암담한 상황 맞아
한화이글스서 재활 뒤 육성선수로
들어가 초스피드로 1군 진입
강한 인상 남겼지만 불안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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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현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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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 사춘기 소년의 야구 유학 생활은 힘들었다. 1학년은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해서 더 그랬다. 물통 나르는 것부터 식당 청소, 빨래 등이 모두 그의 몫이었다. 1학년 야구부원이 적다 보니 5명이 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모든 잡일이 다 끝나면 새벽 2시였다. 오전 수업 때 졸고 있는 게 야구부 선배들에게 들키면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야구 실력은 점점 늘었다. “감독님이 신경을 써주셔서 1학년 겨울부터 주전으로 경기에 나갔어요. 아무래도 경기에 꾸준히 나가니까 실력도 늘었고요. 고시엔(일본 고교야구선수권)에는 예선 8강까지밖에 못 갔지만요.” 신성현은 중학교 시절까지는 투수였지만 일본 유학 뒤 “구속이 안 나와서” 야수로 전향했다. 3학년 초에는 지역 신문에도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야구 유망주로 꼽혔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던 이승엽(현 삼성 라이온즈)을 동경하면서 야구로 미래가 보였던 시기다.
2008년 가을, 고교 졸업 예정이던 신성현은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카프에 4라운드로 지명됐다. 오사카, 교토 소재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 도전을 각오했는데 여름대회 때 안타를 한 개밖에 못 쳐서 불안해하던 차였다. 당시 <닛칸 스포츠> 등 일본 언론은 “교토국제고 1학년 가을부터 팀의 4번 타자를 꿰찼고 고교 통산 30개 홈런을 때려냈다. 115m를 던질 수 있는 강한 어깨와 50m를 6초6에 주파하는 빠른 발까지 있다”고 그를 소개했다. 히로시마 구단은 양손 포구의 수비 기본기, 볼을 무서워하지 않는 근성 등에 후한 점수를 줬다. 그러나 일본 프로 1군의 벽은 높았다. 신성현은 점점 위축되어 갔고 결국 2군에서 전전하다가 2013년 말 방출됐다. “실력이 없었어요. 그건 확실해요. 열심히는 했는데 (실력이) 안 늘었어요.”
홈런과 삼진아웃
야구 2막의 시작은 김성근 감독과 함께 시작됐다. 2013년 겨울, 고양 원더스 일본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가 김 감독의 눈에 들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오라고 했다. 일본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될 정도니까 재능은 있다고 봤다”고 했다. 고양 원더스는 훈련의 연속이었지만 연습벌레답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했다. 그런데 불운이 찾아왔다. 6월 연습경기에서 슬라이딩을 하다가 덜컥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다치기 전 퓨처스(2군) 성적은 타율 0.243, 1홈런 12타점. 다친 이후 2015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배를 마셨고 급기야 고양 원더스까지 해체되면서 소속팀도 사라졌다. “내 인생에 좌절은 없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참 암담했다.
길은 새롭게 한화 이글스 사령탑을 맡게 된 김성근 감독이 다시 열어줬다. 김 감독은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면서 당시 신성현을 재활시켜줄 곳이 없었다. 한화 감독이 된 뒤 구단에 따로 요청을 했다”며 “신성현에게는 ‘재활하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재활이) 되면 팀에 받아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화 관계자는 “김 감독께서 좋은 선수가 있다며 신성현을 추천하셨고 작년 말부터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서산 2군 훈련장에서 재활 및 훈련을 했다. 재활 상태를 보고 정식 계약을 하기로 했는데 경과가 좋아서 5월에 육성선수로 정식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신성현이 고양 원더스에서 받은 월봉은 100만원. 한화 육성선수 계약으로 받은 그의 올해 연봉은 2400만원(월봉 240만원, 야구선수는 3~11월만 월봉을 받는다)이다.
한화의 팀 사정은 그를 일찍 1군 무대로 불러올렸다. 외야수 김경언, 제이크 폭스 등이 줄부상을 당하면서 내야수 정근우가 외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내야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성현이 1군으로 전격 승격됐다. 한화는 신성현을 1군 등록시키는 과정에서 고참 외야수 추승우를 웨이버 공시(계약해지)하기도 했다. 신성현은 당시 퓨처스리그 7경기에서 타율 0.480, 2홈런 5타점 3도루의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5월30일 울산 롯데전. 신성현은 데뷔 후 처음으로 프로 1군 타석에 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주 긴장된 순간”이었다. 수많은 관중 앞에 서본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얼굴에는 어떻게든 티를 안 내려고 했어요. 그나마 스윙 한 번 하고 나니까 정신을 차렸죠. 속구가 들어오는데 마음속으로 ‘와, 진짜 빠르다’ 했어요.” 그는 6월4일 목동 넥센전에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다. 이후 4경기 연속 안타를 쳤다. 6월10일 대구 삼성전 때는 프로 데뷔 8경기 만에 홈런을 터뜨렸다. 그것도 만루홈런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신데렐라 탄생’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너무 자만했을까. 신성현은 이후 거짓말처럼 8경기 13타석 동안 안타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고 결국 1군 엔트리에서도 제외됐다. 7월9일 다시 1군 부름을 받은 그는 시즌 막바지였던 9월30일 대전 삼성전에서 또다시 만루홈런을 쳤다. 그의 올 시즌 만루 때 타율은 0.600(5타수 3안타)에 이른다.
신성현의 2015시즌 성적은 타율 0.225(102타수 23안타), 4홈런 17타점. 득점권 타율은 0.315였다. 평균 3타석당 한 번꼴로 삼진(117타석 44삼진)을 당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아직은 프로 1군 투수들의 변화무쌍한 공에 적응이 안 된 모습이다. 신성현은 “테이크백을 좀 크게 잡거나 하체 쓰는 요령 등을 터득해가야 할 것 같다”면서도 “삼진을 많이 먹더라도 홈런은 많이 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김성근 감독은 “재활을 도울 때만 해도 신성현이 이렇게 빨리 1군에 올라올지 몰랐다. 힘든 과정을 잘 견뎠기 때문”이라며 “신성현은 지금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선수다. 잠재력은 있으니까 자신의 한계를 얼마나 돌파하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다 지나가리라
육성선수 출신으로 에프에이(FA·자유계약선수) 사상 첫 100억원대 계약이 유력시되는(본인은 현재 해외리그 진출을 노리고 있다) 김현수(두산 베어스)는 말한다. “신인 지명 안 되고 자존심 많이 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육성선수로 마무리훈련에 참가해서 1.5군 형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이래서 내가 지명 안 된 거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난 육성선수니까 (다른 선수에 비해) 뒤처진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명만 못 받았을 뿐 출발점은 다 똑같다고 생각해야 해요.” 똑같이 육성선수 출신으로 케이비오(KBO)리그 사상 최초 시즌 200안타의 기록을 세웠던 서건창(넥센 히어로즈)도 말한다. “막연한 불안감이 있겠지만 힘든 시간은 다 지나가요.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이 있는데 그 안에서 100% 이상 준비했던 것 같아요. 100% 가지고는 절대 안 돼요. 100% 이상 준비해놔야만 그나마 100%에 근접할 수 있어요.”
신성현은 육성선수치고는 꽤 운이 좋았다. 팀 사정이 받쳐줬고 기회를 준 지도자가 있었다. ‘야구’로 살아남기 위해 일본까지 갔었고 ‘야구’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신성현은 지금도 일본 오키나와 고친다구장에서 매일같이 치고 달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1군에서 기록한 안타 수보다 삼진 수가 더 많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지금도 저는 야구를 못해요. 그래도 조금씩 느는 것 같기는 해요. 아직은 70점짜리 선수죠. 목표는… 연봉 10억원 선수요. 당장의 꿈이요? 1군 붙박이 주전이요!” 모든 육성선수의 꿈이 그와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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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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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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