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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18 20:38 수정 : 2015.09.20 13:44

이승엽은 올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400홈런 고지를 넘어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마흔살이 된 그는 올 시즌에서 데뷔 후 최고 타율(0.332)을 기록하는 등 26홈런, 90타점을 올렸다. 마흔살에 한 시즌 26개 홈런을 친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사진은 2011년 12월27일 경북 경산시 진량읍 선화리 삼성라이온스볼파크에서 훈련하고 있는 이승엽의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야구가 정말 좋았다. 곱슬머리의 박철순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덩치 큰 이만수가 홈런을 치고 포효할 때는 친구와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렀다. 프로에 입단해 이만수와 한방을 썼을 때의 감격이란…. “시범경기 때 딱 한 번 방을 같이 썼는데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어요.” 초등학교 장래희망 칸에는 늘 ‘야구 선수’라고 적었다.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회원도 했다. 야구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단식투쟁(?)까지 감행했다. 왼쪽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4년 넘게 주위 사람들 몰래 동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서 먹고 마운드에 오르면서도 절대 야구공은 놓지 않았다. 이승엽(삼성)은 말한다. “야구 진짜 재밌지 않아요?”

불혹의 나이. 그래도 그에게 쉼표란 없다. “야구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것”이라면서 후배들보다 일찍 야구장에 나와 땀을 흘린다. 류중일 삼성 감독조차 “홈경기 때 오후 1시에 나오는 나보다 늦게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두른다. 이러한 노력 덕에 지난해(타율 0.308, 32홈런 101타점)에 이어 올 시즌에도 17일 옆구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기 전까지 데뷔 후 최고 타율(0.332)을 기록하는 등 26홈런, 90타점을 올릴 수 있었다. 마흔살에 한 시즌 26개 홈런을 친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어서 그때까지는 진짜 후회 없이 하고 싶어요. 은퇴하면 쉴 시간이 많으니까 지금 하나라도 더 하자고 생각하죠. 예전에 잘했던 것만으로 ‘내가 낸데’(경상도 사투리) 하고 플레이하면 분명히 기회가 와도 잘 살릴 수 없을 거예요. 지금은 20대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처럼 똑같이 하면 분명히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상대 투수에 대한 분석을 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프시즌 때도 ‘올해 잘했으니까 내년에도 똑같이 해야지’가 아니라 더 나은 성적을 내기 위한 조금 더 빠르고 간결한 스윙을 고민하게 되죠. 2013년에 실패했었는데 같은 실패를 반복하면 이 나이에 정말 회복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400홈런 고지를 넘어선 그는 이미 ‘전설’(본인은 ‘아직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지만)이 됐다. 조기 복귀를 위해 18일부터 일본에서 재활치료를 받게 된 그에게 10대, 20대, 30대,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를 풀어달라고 했다. “야구 인생이 어릴 적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그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는 이야기지만 후배 선수들, 더 나아가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작금의 청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될 것 같다.

10대-아팠고 두려웠다

10대 때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부상이었다. 중학교 때 무리했던 탓인지 경북고 1학년 때 허리가 아파서 3개월 동안 야구를 쉬었다. 너무 아파서 잠도 잘 못 자고 걷지도 못했다. 일어설 때마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줘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도 3개월의 강제 야구 휴식기 동안 몸무게가 10㎏이나 늘어서 타격할 때 힘이 붙었다. “조금 못됐던” 성격도 순하게 바뀌었다. 팔꿈치는 계속 아파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경기가 있는 날마다 진통제를 먹었다. 진통제를 안 먹으면 아파서 던지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정말 좋아하는 야구를 못 할까 싶었다. 그는 프로 입단 직후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그의 왼팔은 곧게 펴지지 않는다.

“10대 때는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팔꿈치는 계속 아프고 허리까지 아프고…. 진짜 ‘야구 관둘까’도 싶었죠. 그러다 지금껏 야구만 해왔는데 야구 관두면 뭐 할까도 싶었어요. 아픈 야구 후배들에게 이 얘기는 꼭 해주고 싶어요. 조금 더 천천히 여유를 가져보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중반 때 신인 드래프트가 있으니까 여유라는 게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어요. 잘못하면 프로 지명 못 받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야구는 길게 봐야 해요. 야구가 고등학교 때로 끝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포기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물론 노력하면 분명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한두번의 기회는 오니까 그 기회를 잡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야구를 하다 보면 준비가 없던 선수보다 기회를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늦게 핀 꽃이 오래갈 수도 있잖아요.”

20대-거침이 없었다

“박철순처럼 되고 싶어서” 왼손투수로 입단했으나 팔꿈치 수술 후 재활 기간에 박승호 당시 삼성 타격코치의 권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타자로 전향한 게 결국 ‘신의 한 수’가 됐다. 이승엽은 “그때 타자로 전향 안 했다면 지금쯤 몸무게 100㎏이 넘는 중학교 투수 코치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다리 타법까지 장착하면서 1997년 32홈런으로 최연소 홈런왕에 오르더니 99년 50홈런 고지(54개)를 정복했다. 2003년에는 세계 최연소(만 26살10개월4일)로 통산 300홈런 기록을 달성하며 아시아 시즌 최다 홈런 기록(56개)마저 세웠다. 야구장에는 그의 홈런공을 잡기 위해 최초로 잠자리채가 등장했다.

“프로 와서 처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니까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팔꿈치 다 나을 때까지만 타자 하자 싶었는데 공도 멀리 가고 느낌도 좋더라고요. 이젠 타자가 천직인 것 같아요. 저처럼 20대에 성공을 거둔 후배들이 많은데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반짝 스타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거든요. 반짝 빛나는 것보다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하고 더 대단한 선수가 아닐까 싶어요.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굉장히 절제된 생활이 필요하고 자기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든요. 저만 해도 오프시즌 때마다 몸무게 97~98㎏을 유지하려고 엄청 노력해요. 그나마 저는 유혹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야구를 너무 좋아했고 야구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한순간의 유혹에 빠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가족도 생각해야 하고.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 내가 야구를 할 수 있는 힘이에요. 야구를 하는 태도도 성숙해지죠. 내가 못하면 가족이 상처를 받는데 그때는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더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나 때문에 가족을 욕보게 할 수는 없잖아요.”

중고교 때 야구 못하게 할까봐
몰래 진통제 먹으며 공 던진 투혼
마흔살인 올해 데뷔 후 최고타율
한 시즌 홈런 26개에 90타점
400홈런 넘은 그 누가 넘어설까

“자만심으로 뭉쳐 일본 갔지만
일본에 모든 걸 묻고 왔어요
인간 이승엽으로 완성체가 됐죠
어른 됐고 야구 더 재밌어졌어요
일본에서 절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지난 6월3일 경북 포항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 대 롯데 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개인 통산 400홈런을 친 뒤 이승엽이 홈으로 달려가고 있다. 연합뉴스

30대-희로애락을 경험했다

지바 롯데 유니폼을 입고 일본 무대에 도전한 첫해(2004년)는 험난했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내가 왜 왔지?’ 싶었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실감했다. 늘 무대 중앙에만 있다가 벼랑 끝으로 몰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해가 뜰 때 잠이 드는 날이 반복됐다. 그나마 2005년에는 달라졌다. 예비 아빠가 되면서 책임감도 강해졌고 김성근 현 한화 감독이 마침 지바 롯데 인스트럭터로 왔다. 김 감독은 “핑계를 대지 말고 너 자신을 원망해라. 남에게 절대 기대지 말고 네가 해결해라”라며 이승엽을 채찍질했다.

경기 시작 전과 끝난 후에 혼자서 티배팅을 400~500개 했다. 손바닥에서 피가 날 정도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때도 손바닥에 테이핑을 하고서 연습했다. 김성근 감독은 “당시 이승엽을 심할 정도로 몰아붙였던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최고 타자가 일본에서는 안 된다는 게 싫었다”며 “삿포로에서 시즌 30홈런을 쳤을 때 이승엽과 통역을 불러 호텔 방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돌더라. 한국 야구를 살려준 것 같아서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진짜 야구 인생에서 가장 많은 연습을 했던 게 2005년 같아요. 진짜 잊을 수가 없죠. 원정 가서도 호텔 밖에서 스윙 연습을 했으니까요. 하루는 홈런 포함해서 4타수 4안타 치고 선수들끼리 기분 좋게 식사하기로 약속해서 감독님께 연습 한번만 빼달라고 부탁했는데 단호히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정말 화가 나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한번도 안 쉬고 전력으로 200번 스윙을 하고 호텔로 들어갔어요. 그런 거 보면 저도 참 대단했던 것 같아요.(웃음) 첫해 성적이 안 나서 ‘일본에서는 내가 안 통하는구나’ 싶었는데 감독님이 그런 생각을 깨부숴주셨어요. ‘네가 가지고 있는 스윙을 하면 통한다’고 늘 격려해주셨거든요. (김 감독은 “미국, 일본 선수들도 부러워하는 게 이승엽의 스윙”이라고 했다.) 훈련을 통해서 그동안 야구를 쉽게만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던 계기도 됐어요.

남들은 일본에서 실패했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야구를 보는 눈이나 실력이 늘었고 야구를 대하는 태도도 정말 프로스럽게 변했으니까요. 실패했던 해가 너무나도 많았지만 실패했던 경험이라든가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 그리고 외국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 평생 돈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을 했어요. 그때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가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갔다 오면서 부지런한 성격으로 바뀌었거든요. 진짜 8년 동안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고. 일본 가기 전에는 진짜 제가 최고인 줄 알았거든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서 일본에 갔지만 한국에 올 때는 모든 것을 일본에 묻어두고 왔어요. 비로소 인간 이승엽으로 완성체가 된 거죠. 야구를 진심으로 대하면서 진짜 어른이 됐고 야구도 더 재밌어졌어요. 그래서 절대 실패한 게 아니에요.”

마흔살-꽉 차게 여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승엽은 성실하다. 20대 때도 열심히 훈련을 받았지만 지금은 “나 스스로 살기 위해서”, “오래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못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열 받아서 그런 기분을 안 느끼고 싶어서” 연습한다. 과거의 영광 때문에 베테랑이라고 예우를 받는 것은 싫다.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이 팀에서 ‘선배 선수’가 아니라 후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야구 선수’로 행동한다”고 했다.

야구장에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야구 선수지만 집으로 가면 온전히 두 아이의 아빠로 돌아간다. 쉬는 날 가장 큰 낙이 첫째 은혁이와 영화를 보러 가고 둘째 은준이와는 사우나를 가는 것이다. “같이 <국제시장>을 보면서 울었는데 은혁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혼났다”는 그는 “야구를 잘하면 뿌듯해서 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고 못하면 미안해서 ‘다음에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우리 시대의 아빠다. “아내에게 시간 못 내주는 게 미안해서 은퇴하면 다 갚겠다”고 말하는 남편이기도 하다.

“올해 그나마 베테랑들에게 조금이라도 야구를 오래 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해요. 베테랑 됐다고 후배들에게 내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권위의식이잖아요. 올라와야 할 젊은 선수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후배들에게는 베테랑 선수들을 넘어서야만 프로야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심어주고 싶어요. 목표의식은 확실해요. 2000안타 달성하고 좋게 마무리하는 거. 500홈런이요? 너무 멀어요. 은퇴 시기를 2년 뒤로 보고 있는데 2년 후 500홈런까지 10여개가 남으면 고민이 될 것도 같긴 해요. 하지만 500홈런을 채우려고 욕심부리다가 잃는 것도 있겠죠. 그때(2년 뒤)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은 야구 다 하고 나중에 거울 앞에 서서 ‘20년 넘게 야구 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 나 자신에게 말할 정도가 되면 정말 행복한 야구 선수가 아닐까요.”

김양희 기자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 김양희 맨 처음 야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보면 꼭 그날의 야구 스코어가 적혀 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맨 먼저 가고팠던 곳이 잠실야구장이었다. 혼자서 잠실야구장 구석에 앉아 캔맥주 들이켜면서 경기를 보곤 했다. 지금은 휴일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장을 찾고는 한다. 어쩌다 아들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야구 동화도 썼다. ‘김창금의 축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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