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8일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2015 KBO리그’ 케이티와의 경기에 지명타자로 나와 1회 무사 2루 상황에서 개인 통산 300번째 홈런을 친 뒤 3루를 밟고 있는 이호준. 불혹의 나이를 맞은 올해, 이호준은 젊은 선수들과 견줘도 손색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엔씨 다이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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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양희의 야구광
NC 다이노스 이호준
두 다리가 욱신거렸다. 187㎝의 큰 키로 긴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가 버거웠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큰 목소리로 거듭 외치면서도 눈은 계속 현관문을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문이 열렸다. 2군 감독은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 돈으로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에 ○요일에 돌아와라.”
그의 나이 갓 열아홉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라는 살벌한 세계, 그것도 위계질서가 가장 엄격하다는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에서 그는 끝 모를 방황을 이어갔다. 숙소에서 도망친 것만 수차례. 하지만 현역 경찰이던 아버지의 감시망을 뚫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잠적해도 귀신같이 찾아냈다.” 한달 동안 친구 집에서 칩거하다가 밖으로 나온 첫날 붙잡힌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도망을 다니면서 관두고 싶던 프로야구를 20년 넘게 하면서 300개 이상의 홈런(역대 8번째)을 쏘아 올리게 될지. 2015 프로야구 유일의 22년차 베테랑 이호준(40) 얘기다. 올 시즌 프로야구 등록 선수들 중 1994년 데뷔한 이는 이호준뿐. 프로야구 선수 등록 최다 연차 기록은 2013년 말 프로 23년차 때 은퇴한 박경완이 보유중이다. 내년이면 그도 23년차가 된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었던 해태 마운드
‘야구는 이종범처럼, 인생은 이호준처럼.’ 최근 야구팬들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다. 오죽하면 마산 시내에서 그와 마주치는 꼬마 야구팬들까지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며 큰 소리로 외칠까.
이호준 나이별 타격 성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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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이호준처럼’ 티셔츠를 입은 엔씨 다이노스 어린이 팬들과 함께한 이호준. 엔씨 다이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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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즈음엔 병역문제로 위기
그렇게 관두고 싶던 프로야구를
20년 넘게 하며 300개 이상의
홈런 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SK서 몸값 비해 성적 부진했지만
2012년 말에 NC로 이적하며 반등
3할 고지 찾고 세자릿수 타점 눈앞
팀 맏형 역할 하며 중심타자 활약
NC 포스트시즌 진출에 밑돌 놔 타자로 전환한 뒤에는 도망 안 가 이호준과 함께 같은 팀에서 현역 선수로 뛰었던 이순철 <에스비에스> 야구해설위원은 “고교 졸업 뒤 투수로 왔는데 기존 투수들이 워낙 쟁쟁해서 더 기를 못 펴고 있었다. 팀내 위계질서도 심했고 아버지 또한 굉장히 엄하신 분이라 본인도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데뷔 1년 만에 타자로 전향했으니 어린 마음에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나 같은 해태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이종범 <엠비시스포츠플러스> 야구해설위원은 “투수로 들어왔는데 투수력이 너무 세니까 이호준이 처음에는 운동에 집중을 못하고 배회를 조금 했다. 그래도 타자로 전향하면서부터는 운동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당시만 보면 운동을 이렇게 오래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호준은 “스무살 전후에 내 야구 인생 최고의 방황기를 겪었다. 당시 아버지나 코칭스태프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며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치는 후배들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당사자가 얼마나 야구에 질려 있는지 경험상 잘 알기 때문에 대화도 잘 통한다”며 웃었다. 극심한 성장통을 겪고 타자로 변신한 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본인 스스로도 “타자 전환 뒤에는 도망을 안 갔다”고 했다. 타자로 치른 첫 실전 경기에서 홈런 두 방을 친 것도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이호준은 98년 처음 규정타석을 채운 뒤 2000년 6월 신생팀인 에스케이로 트레이드되면서 붙박이 주전을 꿰찼다. 2003년에는 36홈런(부문 4위)을 때려냈고 2004년에는 생애 첫 타점왕(112개)도 차지했다. 이종범 해설위원은 “에스케이로 이적하면서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고향 팀이 아니니까 운동을 잘해야만 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이순철 해설위원은 “아마 타이거즈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성장 과정이 굉장히 더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생팀에서 마음껏 자신의 야구를 해나간 것 같다”고 분석했다. 2004년 말 프로야구를 휩쓴 병역비리에 연루되며 절정의 상승세가 꺾인 이호준은 2007년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으나 2012년 초 또다시 위기를 겪었다. 경기 출장 시간이 줄어들면서 은퇴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그를 붙잡아준 이는 그의 아내, 홍연실씨였다. “경기 끝나고 아내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왜 당신이 핑계를 대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지금까지 그런 야구를 제일 싫어했으면서 당신이 지금 그런 야구를 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더라. 처음에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남 핑계만 대면서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는데 정작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 뒤부터 마음을 비우고 한 경기, 한 타석에만 집중하다 보니 시즌 막판에 타율 3할이 돼 있었다.” 불혹의 나이를 맞은 올해, 이호준은 젊은 선수들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23일 현재 타율 0.309, 16홈런 79타점으로 3년 연속 20홈런은 물론이고 타점왕에 오른 2004년 이후 11년 만에 세자릿수 타점도 가시권에 뒀다. 이호준은 “몸쪽 공에 약해서 몸쪽 공에 대처하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올 시즌 이호준의 ‘한 방’에 번번이 당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은 “(이호준이) 갈수록 야구가 는다. 야구 자체의 스케일이 커졌고 노림수나 콘택트 부분이 많이 좋아졌다”며 “팀내 자기 위치를 잘 인지하면서 꼭 필요할 때 쳐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호준의 올해 한화전 성적은 32타수 15안타(0.469) 4홈런 12타점에 이른다. 김 감독은 “해태에서 처음 봤을 때도 이대진과 함께 타격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래도 참 많이 성장했고 그 나이에 그만큼 하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팀 리더로서의 면모에 대해서도 “에스케이 시절에도 리더 역할은 했었는데 지금은 행동으로 더 보여주는 듯하다. 여러모로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평했다.
NC 다이노스 이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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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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