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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대표팀의 친구이자 라이벌 골키퍼인 김정미(왼쪽)와 전민경이 지난달 경기도 파주 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훈련하고 있다. 14일 열리는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 두 사람 중 누가 출전할지는 아직 모른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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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여자축구 수문장, 김정미와 전민경
둘을 볼 때마다 그해 봄이 생각난다. 뙤약볕 아래 넘어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공을 던져주는 코치는 무심하게도 “더 빨리 못 움직여!”라며 구석으로 공을 던진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어떻게 저렇게 뒹굴 수 있을까? 지겹지는 않을까? 전력을 다해 몸을 던지는 훈련은 수도 없이 해왔을 텐데…. 그러나 축구 코치의 생각은 다르다. “프로 골퍼가 줄기차게 연습을 하는 것은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골키퍼도 마찬가지여서 훈련을 멈출 수 없다.” 2004년 4월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위해 소집된 여자축구대표팀의 골키퍼 김정미와 전민경은 그렇게 구르고 굴렀다. 무엇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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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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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허약한 한국식 여자축구
처음부터 방향은 없었다. 아니 길도, 빛도 없어 보였다. 김정미의 아버지 김형영씨는 “나도 모르고, 아이도 몰랐다. 키가 크고 하니까 데려갔는데,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만날 공만 차니 속상하기도 했다”고 했다. 본인은 좋아했을까. “그럼요. 축구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됐지, 어떻게 그 어려운 과정을 버텨냈겠어요.” 김정미는 울산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달리기 1등이었다. 2등과의 격차는 5m 이상이 났다. 그 소문을 듣고 현대청운중학교의 축구 감독이 찾아왔다. “앞으로 축구 괜찮습니다. 잘 키우겠습니다.” 그렇게 전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해 중3 때 국가대표 상비군이 된다. 전민경도 다르지 않다. 현대청운중학교는 거제에서 유명한 날쌘돌이 전민경을 스카우트한다. 전민경의 언니 전민정씨는 “그때는 몰랐다. 동생이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야 합숙훈련이나 운동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미래 한국 축구의 간판 수문장 둘은 만났고, 고등학교도 같은 재단의 울산 현대고로 진학한다.
부모 심정은 똑같다. 우리 아이 밥은 잘 먹나? 부상은 안 당할까? 김정미의 아버지는 “나야 학교가 가까우니 자주 찾아가봤지만 먼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그래도 밥은 잘해줘서 마음은 놓였다”고 했다. 사춘기 여학생이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합숙의 공동생활에서는 사적인 공간이 없다. 운동이라는 게 몸을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싫은 때도 많지만 안 할 수가 없다. 코치의 억압이 작용하는 때도 있다. 김정미도 중학 2학년 때 친구 5명을 데리고 무단이탈한 적이 있다. 전민경을 비롯해 선수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자기 주도적 결정이라기보다는 운명이다. 누군가 손을 내밀고, 선수는 불확실성에 휩쓸려 간다. 협회의 단계별 계획이나 100년 구상 같은 것은 없다. 한국 여자축구가 출발했을 때의 풍경과 비슷하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여자축구 종목이 신설되자 대한축구협회는 육상·하키·배드민턴·펜싱 선수들을 모아 팀을 급조했다. 지금 프로축구 강원FC의 임은주 대표가 필드하키 출신의 초대 대표팀 선수였고, 10여년 뒤인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에 출전했던 이명화(펜싱), 유영실(배드민턴)도 종목을 바꾼 선수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풀뿌리 선수들 중에서 엘리트팀을 꾸리는 상향식이 아니라, 위에서 기획해서 선수를 그러모아 최강팀을 만든 뒤 전파하는 방식이다. 2000년대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였던 이지은 스포츠토토 코치는 “선수층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방과 후 체육활동 때 남자팀에 2~3명이라도 여학생을 넣어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지금처럼 한번 축구 선수가 되면 그 길로 쭉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저변이 넓어질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몇몇 특출난 선수를 집중적으로 키워내는 한국식 여자축구는 성적을 낼 수 있지만 기초는 허약하다. 어렸을 때 마구 혹사해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가 많고, 선수 생명도 길지 않다. 2014년말 현재 대한축구협회 등록 여자축구 선수는 1705명에 불과하다. 팀 숫자도 초등(23개), 중등(20개), 고등(17개), 대학(9개), 실업(9개)을 합쳐 78개다. 교육적 가치나 남녀평등 차원에서 여자축구를 확장시키는 미국이나, 클럽 형태로 하부구조가 강한 독일식과 다르다. 2010년 20살 이하 월드컵 동메달, 17살 이하 여자월드컵 금메달 성과를 냈지만 그것은 외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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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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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와 전민경은 1세대 여자축구 선수들과 달리 최소한 (인조)잔디 위에서 처음부터 축구 한길을 판 2세대다. 1993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부임 뒤 현대가를 중심으로 중·고·대학·실업에서 여자축구팀을 꾸리면서 운동장 환경도 조금씩 개선됐다. 그래도 골키퍼는 다이빙 뒤 낙하 충격을 받고, 선수나 골대와 부딪힐 경우 큰 부상을 입는다. 전민정씨는 “민경이가 몇년 전 턱관절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다. 2~3주간 오직 물과 우유만 먹으면서 버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김정미도 WK리그에다 대표팀 경기 출장으로 발목과 무릎이 좋지 않다. 사실 각 실업팀의 선수들은 몸이 성하지 않다. 박용진 대교팀 주무는 “학원에서 선수로 뛰다가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던 선수들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된다. 아마 다른 실업팀에서도 선수들 사정은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한솥밥을 먹던 둘의 여정은 현대고 1학년 때 갈린다. 고교 최대어인 둘이 한 팀에 있는 것은 중복이었다. 한명만 뛸 수 있기에 둘한테도 좋지 않았다. 당시 전민경이 현대고의 주전으로 그대로 남았고, 김정미는 마산의 한일전산고로 옮긴다. 김형영씨는 “정미가 옮겨간 뒤 바닥이었던 학교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갔다”며 웃었다. 둘은 그때부터 진짜 맞수가 됐고, 고교를 마친 전민경이 울산과학대로 진학한 뒤 실업팀 대교로 입단하고 김정미가 영진전문대를 거쳐 현대제철로 들어가면서 대학과 실업 무대에서 넘버원 골키퍼를 향한 경쟁을 이어갔다.
현대고 1학년 때 한솥밥 먹다
김정미가 마산 한일전산고로 가며
둘은 진짜 맞수가 됐고 대학과
실업무대, 국가대표팀에서
서른 넘은 지금까지 골키퍼 경쟁
큰 키에 공중볼 처리 뛰어난 김정미
순간적 탄력과 패기 좋은 전민경
출전횟수에선 김정미가 2대1 정도
앞서지만 전문가 평가는 팽팽
월드컵 주전 누가 계속 나갈지 몰라
한쪽이 앞서가면 금세 따라잡고…
둘의 특징은 너무 다르다. 대표팀 내 양강 시대를 연 둘이 10년 이상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다. 김정미는 1m78의 큰 키가 최대의 강점이다. 코너킥이나 프리킥 상황에서 높게 날아오는 공중볼을 처리하는 데 유리하다. 킥력도 좋고 순발력도 있다. 경험과 자기 관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종종 수비수와의 호흡이 맞지 않아 엇박자가 나는 것은 약점이다. 성격은 세심한 편이다. 이번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에 출전해서도 하루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전화해 “아버지, 메르스 조심하라” “엄마 아빠 사랑한다”며 마음을 전한다.
그 반대편에 있는 선수가 전민경이다. 그가 골문에 서면 경기장이 시끌벅적해진다.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수비수들을 독려한다. 좌우로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몸의 탄력과 패기가 좋다. 다만 1m72의 키 때문에 제공권에서는 김정미에게 밀린다. 속으로 많이 삭이고 겉으로는 밝게 웃는 스타일로 후배들한테는 ‘감자 언니’라 불린다. 축구를 하면서 “악으로 버텨왔다. 힘들다”며 펑펑 울었던 적은 26살 때 딱 한번일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 언니와는 카톡만 짧게 주고받는다. 캐나다 월드컵에 출전한 윤덕여 대표팀 감독도 “당일의 컨디션과 상대팀에 따라 둘 가운데 한명을 기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무리 친하고, 우정이 돈독해도 대표팀 주전 수문장 자리는 하나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마주한 둘이 대표팀 주전을 놓고 벌인 첫 맞대결은 2003년 아시안컵 대회 겸 미국 월드컵 예선전이었다. 당시 안종관 여자대표팀 감독(현 경신고 감독)은 둘 모두를 대표팀 훈련에 소집했다. 안 감독은 “주전 골키퍼는 선배인 정호정이었지만, 세대교체를 위해 정미와 민경이를 불러들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훈련 과정에서 김정미가 좀더 도드라졌다. 골키퍼 포지션은 한번 결정되면 은퇴할 때까지 거의 변동이 없다. 선점 효과가 어느 포지션보다 크게 작용한다. 운도 따라야 한다. 대표팀 감독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골키퍼 스타일이 있다. 기왕이면 자신이 지휘하는 실업팀 소속의 선수에게 약간의 점수를 더 줄 수도 있다. 물론 그것도 실력이 뒷받침된 이후의 이야기다.
김정미는 2003년 6월 타이 방콕의 라차망칼라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새로운 대표 수문장의 등장을 알렸다. 미국 월드컵 직행권 3장이 걸린 이 대회의 1~3위 후보는 북한, 일본, 중국이었다. 그런데 겁없는 신예 김정미가 북한전에서 무승부(2-2)를 연출한 데 이어, 일본과의 3·4위전에서 기적 같은 승리(1-0)를 이끌었다. 1990년 여자축구대표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일본전(5무8패) 무승의 한국이 14번째 맞대결에서 이긴 것이다. 안 감독은 “우리가 앞서갔지만 박은선이 거친 행동으로 퇴장당하면서 10명이 싸워야 했다. 수비적으로 경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정미가 선방을 해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4위가 된 일본은 북중미의 멕시코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월드컵에 진출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전민경의 추격은 불과 8개월도 안 돼 대표팀 승선으로 이어졌다. 김정미가 7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한달 만에 일본에 대패(0-5)했고, 9월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에서도 3패(11실점)한 뒤다. 마음을 추슬러 복권을 노리던 전민경은 2004년 4월18일 괌과의 대결에서 승리(7-0)하며 대표팀 골키퍼로 데뷔를 했다. 둘의 시대를 연 것이다. 김정미가 출전 횟수에서는 2 대 1 정도로 전민경보다 앞서지만 전문가 평가는 팽팽할 정도로 백중세다. 김정미가 앞서가는 듯하면 전민경이 어느새 따라잡고, 다시 김정미가 속도를 내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최근 3~4년 사이에 전민경이 역전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여자월드컵에 출전한 둘의 경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박남열 대교 감독은 “민경이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한 경기라도 뛰고 왔으면 좋겠다”며 소속팀 선수를 응원했다. 전민경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몸이 둔해질까봐 5㎏ 이상 감량까지 했다. 그러나 뛰느냐, 못 뛰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경쟁을 바라보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손종석 스포츠토토 감독은 “여자 선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을 바깥에서 보면 정말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느낀다. 한국 여자축구의 대들보는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포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전민정씨도 “동생이 뛰면 좋을 것이다. 욕심이 없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꼭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강하다. 하지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20대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10일 브라질전은 김정미가 나가
둘은 중학교 때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변방의 여자축구를 지켜왔다. 관중석이 텅 비어도, ‘뇌사 집행부’라는 비아냥을 듣는 여자축구연맹(오규상 회장)의 무대책에도, 그저 “축구가 인생의 전부”이고 “축구가 즐겁기” 때문에 넘어졌다가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2004년 파주 대표팀훈련장 인터뷰 때 김정미는 “민경이가 있어 눈물이 나올 정도로 힘들어도 참는다”고 했고, 전민경은 “어려울 때 힘이 돼 정미가 좋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후배들이 따라왔고 이젠 대표팀의 최고 선배가 됐다. 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정신이 단련되듯이, 둘은 경쟁 속에서 신뢰를 쌓았다. 승리를 향한 열망 앞에서는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착각마저 든다. 전민정씨는 “실수했을 때 서로 아쉬워하며 격려한다. 정미가 나가 경기에 질 때 민경이가 가장 많이 아파한다”고 했다. 10일 월드컵 E조 첫 경기 브라질전에 주전 수문장으로 나간 김정미가 2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막아내며 분투했지만 0-2로 패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는 승패에 30% 정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중요하지만 선수들이 기피하는 자리이고, 연맹이나 협회에서 여자축구 골키퍼를 육성하는 데 소홀했다. 김정미와 전민경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 골키퍼 포지션에 많은 후배들이 나올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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