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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13 19:44 수정 : 2015.02.15 13:22

지난달 17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브리즈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아시안컵 조별리그 A조 3차전 한국 대 호주 경기에서 골키퍼 김진현이 상대 공격을 막아낸 뒤 수비수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브리즈번/연합뉴스

[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골키퍼 김진현은 누구인가

가냘프고 긴 손가락. 속살처럼 희다. 느낌이 온다. 섬세한 성격이다. 금세 드러났다. 차를 주문하는데 “아무거나 달라!”지 않는다. “커피 말고요, 주스 있어요?” 찬찬히 설명을 듣는다. 그러더니 “키위 주스 주세요!”라며 메뉴판을 덮는다. 짧은 순간이지만 80%는 알 것 같다. 이 친구 깐깐하다. 낮은 목소리. 톤의 변화가 없다. 얘기가 조금 진행돼서야 웃는다. 경계를 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AB형답게 꼼꼼하면서 때론 소탈하다. 하긴 축구대표팀 골키퍼 아무나 할 수 없다. 차분하면서도 자유롭게 변신해 강력본드처럼 골문을 밀봉해야 한다. 그에게 딱 맞아 보였다.

첫 A매치, 스페인에 1 대 4 패배

김진현은 어디서 왔는가? 축구팬들이라면 공통적으로 품는 의문이다. 청소년팀이나 대표팀에서 그의 활약을 본 기억이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스쳤을 뿐이다. 축구인들만 “원래 재능이 있는 친구다. 각급 대표팀에 단골로 뽑혔다”고 말한다. 2005년 18살 이하 대표팀에 뽑혔고, 2007년 캐나다에서 열린 20살 이하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당시 1순위 골키퍼는 조수혁이었지만 본선에서는 김진현이 주전 장갑을 꼈다. 미국, 브라질, 폴란드를 상대로 2무1패. 나름 선전했지만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A매치 경기 데뷔는 한참 뒤인 2012년 5월 스페인 평가전에야 이뤄진다. 주전 골키퍼 정성룡은 부상이었고, 두번째 골키퍼 김영광은 소속팀 일정으로 빠졌다. 기회는 왔는데 상대는 세계 1위 스페인. “왜 하필 데뷔전에…”라며 운을 뗀 김진현은 “긴장을 많이 했고, 경험도 없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1-4로 패배. 그렇게 딱 한번 A매치에 등록한 뒤 2년여간 그는 넘버 스리나 포였다.

수원 구운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몸을 날려 공을 잡으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상대의 강슛을 얼굴로 막아야 할 때는 겁도 났다. 맨땅에 다이빙하면서 양쪽 골반뼈 부분은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공격수나 미드필더보다 골키퍼가 좋았다”고 했다. 열번을 차 한번 넣으면 영웅이 되는 공격수와 달리 골키퍼는 아홉번을 잘 막다가 한번을 못 막으면 역적이 된다. 운명적으로 수세적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그는 어떤 기쁨을 발견한 것일까. 김진현은 “난다”는 표현을 했다. 날개 없는 인간이 중력을 거슬러 날기는 어렵다. 하지만 창공의 독수리도 애초부터 난 것은 아니다. 기어다니고 뛰어다니다 날게 된 것이다. 골키퍼가 지켜야 하는 숙명의 공간은 가로 7.32m(8야드), 높이 2.44m(8피트). 골대 가운데 서 본 사람은 알지만 양쪽 끝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김진현은 “그 공간에서 마음대로 날 수 있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1m92의 신장에 82㎏의 장신. 날아야 하는 골키퍼로서는 큰 몸이 짐이 되지만 더 멀리 손을 뻗거나 상대에게 골문을 꽉 채운 듯한 위압감을 주기에는 유리하다. 그런데 체형은 골키퍼의 우열의 기준이 아니라 특징일 뿐이다. 오히려 골키퍼의 등급은 감각이나 디엔에이(DNA)에서 갈린다. 박영수 18살 이하 대표팀 골키퍼 코치가 대학 골키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골문 5m 앞에는 불이 들어올 수 있는 장치를 세우고, 가까이에는 좌·우·중앙 이곳저곳에 9개의 공을 나눠 걸어 두었다. 불이 들어오면 해당 위치의 공을 터치하도록 해 속도를 쟀는데, 대개 0.2초의 반응이 나왔다. 그 비디오와 아시안컵 김진현의 선방 장면을 비교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박영수 코치는 “직접 측정은 아니지만 김진현의 동영상을 비교해서 보면 0.05초 차이가 난다. 다른 골키퍼와 달리 0.15초에 반응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고 했다. 공이 들어오는 순간 그 방향을 잡아내는 생각의 속도가 빠른 것이다. 박 코치는 “동물적인 감각은 훈련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타고나야 한다”고 했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순발력이 탁월하다”고 했고, 조영증 K리그 심판위원장은 “판단이 뛰어나다”고 했는데 감각적인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네이처(nature·자연)냐 너처(nurture·육성)냐?’라는 질문이 있다. 김진현은 네이처에 가까운 골키퍼다. 그의 인생에서 골키퍼 코치의 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남들 보면서 배우고, 들으면서 깨치는 17년 시간이었다. 롤모델은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37)이다. 키도 1m91로 김진현과 비슷하고 체형도 마른 편이다. 광대뼈 아래 볼이 들어간 것을 보면 많이 닮았다. 부폰은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 선수들의 골을 얄미울 정도로 잘 막다가 설기현한테 동점골, 안정환한테 연장 역전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당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는 데 이견이 없다. 김진현은 “중고등학교 때는 인터넷 카페에서 부폰 동영상을 찾아가면서 따라 했다. 요즘엔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의 영상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했다. 독학을 하면 장단점이 있다. 김진현은 “코치의 지도를 못 받은 것은 약점이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지점은 전문가 사이에서도 미묘한 부분이다. 좋은 코치를 만나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돼 소질을 만개할 수 있다. 만에 하나 불완전한 지도자를 만난다면 원석은 영원히 돌로 남는다. 김진현은 조탁하듯이 스스로 갈고닦아 보석을 만들었다.

골키퍼는 확률과 싸움을 한다. 상대가 찬 공의 궤적은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점쟁이처럼 맞힐 수는 없다. 다만 슈팅 전 상대의 발끝이나 발을 맞고 떠난 공의 출발 각도에 맞춰 재빠르게 방어할 영역을 설정해 공을 쳐낼 수 있는 확률을 높인다. 어려서부터 유지해온 좌우 1.5, 3.0 시력은 천복이다. 아무리 상대의 발등에 맞은 공이 빨라도 움직임을 전달하는 빛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렇게 각도와 영역을 줄이기 위해서는 경험과 집중력이 필수다. 김진현은 “물기나 잔디 등 그라운드의 조건을 체크하고 상대의 볼 컨트롤을 유심히 본다. 크로스 상황에서는 공이 발에 맞는 순간에 대충 도착 지점을 설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 변수가 많다. “지역방어를 하는 우리 선수들의 위치를 입력해 두고 있어도 틈새로 파고드는 상대 공격수가 등장하면 복잡한 상황이 된다. 그런 것도 계산해서 대응해야 한다.” 몸에 맞고 굴절된 공은 더 아찔하다. 그러나 역동작이 걸린 상태에서라도 잡아내는 것을 꿈꾼다.

대학 골키퍼 대상으로 한 실험
공 터치하는 데 대개 0.2초
김진현 동영상은 0.05초 더 빨라
코치 지도 한번 받아본 적 없이
스스로를 조탁한 17년 시간

“소속팀 2부 강등에 위축 안돼
위기는 꼭 오고, 기회도 꼭 온다
지금이 비등점은 아닐 것
더 잘해 정상을 밟는 게 목표
나는 포기하는 스타일 아니다”

고교 때 허들 놓고 수없이 넘으며 단련

골키퍼의 비중은 11분의 1이 아니다. 슈틸리케 감독은 “포지션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가르기는 어렵다. 다만 뒤의 골키퍼가 불안하면 선수들이 잘 뛸 수 없다”고 했다. 박영수 코치는 “허망하게 골을 내줄 경우 선수들한테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반대로 거의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막아내면 없는 힘도 생겨난다. 축구는 심리의 경기다”라고 했다. 팽팽한 경기에서는 승패의 60%까지 골키퍼가 결정짓는다는 주장도 있다.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오만과의 예선 첫 경기 종료 직전 코너킥에 이은 상대 헤딩슛을 전광석화처럼 쳐낸 일이나, 8강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골지역 밖으로 뛰어나와 공을 잡아챈 뒤 왼쪽 팔꿈치를 잡고 쓰러진 모습들은 팀을 바꾼다. 진퇴의 판단도 정확해야 한다. 지난해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알제리전 패배(2-4) 때 정성룡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첫번째와 세번째 실점은 후방에서 공이 길게 올라오면서 상대 공격이 시작됐다. 한 축구인은 “처음부터 판단을 달리해 미리 대비했더라면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대표팀 골키퍼 자리는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잘해도 조금 더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출전할 수 없다. 1970년대 이세연과 변호영의 경쟁부터 시작해 오연교와 조병득(80년대), 최인영과 김병지·이운재(90년대) 등 간판 골키퍼 사이에서도 명암은 갈린다. 변호영은 이세연의 그림자에 가렸고, 90·94년 월드컵은 최인영이 대표 골키퍼로 나섰다. 94년 월드컵 막판 잠깐 등장했던 이운재는 98년 프랑스월드컵에는 김병지에 밀려 아예 나가지도 못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 직전 주전으로 낙점된 이래 8년간 이운재 시대를 열었을 땐 최은성이 “분위기 메이커”에 만족해야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정성룡이 잡아챈 뒤 김영광, 김승규, 김진현, 이범영은 늘 2인자였다. 전북의 권순태나 포항의 신화용도 재목이지만 발탁되지는 않았다. 참 어려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운도 따라야 한다. 신태용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김진현은 슈틸리케 감독과 잘 맞는 선수다. 선수도 궁합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딱 맞는다”고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5일 베네수엘라 평가전(3-1 승) 때 김진현의 모습을 비디오 영상으로 체크한 뒤, 직접 지휘봉을 들었던 10월10일 파라과이전(2-0 승)에 그를 내세운다. 11월18일 이란 원정전(0-1 패)부터는 김진현 쪽으로 완전히 쏠렸다. 슈틸리케 감독은 김진현의 장점을 “침착함”이라고 했다. 패스와 점유율을 강조하는 슈틸리케 감독은 최후의 수비수 골키퍼부터 공격 작업이 시작된다고 본다. 가까운 지역의 동료에게 공을 밀어주거나 멀게는 중앙선 부근까지 던져주면서 공격 빌드업을 하는 능력은 김진현이 역대 최고다. 이런 동작은 단순해 보이지만 경기의 흐름을 읽는 눈이 없거나 맥을 짚지 못하면 나오지 않는다. 타이밍 싸움이어서 1초라도 늦으면 공격 작업이 매끄럽게 되지 않는다.

실력이 없으면 운도 없다. 농구 선수 출신 아버지의 승부욕처럼,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린다. 고교 때 점프력이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허들을 갖다 놓고 수없이 넘으며 단련했다. 웨이트도 기본이다. J리그 경기가 토요일날 열리면 앞서 3일간은 하루 1시간30분 정도 체력훈련을 꼭 한다. 2010년 왼쪽 무릎 연골을 들어낸 이후 더 그렇다. 대표팀 주치의 출신의 송준섭 서울제이에스병원 원장은 “무릎 연골이 없으면 허벅지 쪽의 근력을 증강시켜서 고통이나 불편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김진현은 “웨이트 훈련이 지루하지만 무릎 아프다는 것을 핑계 삼아 더 한다”고 했다. 시즌 중에 맥주 한잔 마시는 것도 꺼린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득실거리는 유럽 무대 진출까지 갈 길은 멀다. 골키퍼는 선배한테도 큰 소리로 “막아!” “들어와!” 등 끊임없이 떠벌리는 게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서도 김진현은 수비진을 잘 통제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소속팀 세레소 오사카는 올해 2부로 강등됐다. 1부의 강팀 공격수들을 만나 실력을 더 쌓아야 하는 김진현한테는 불리할 수도 있다. 김진현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위기는 꼭 오고, 아무리 못하는 팀이라도 기회는 꼭 온다. 그것을 막기 위해 90분 집중하는 것은 똑같다.” 축구 선수의 기량은 26~28살에 정점이다. 그 이후에 기량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더욱이 골키퍼는 나이에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운재가 2002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가 29살이었다. 김진현은 28살이다. 김진현은 “지금이 비등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잘해서 꼭 정상의 자리를 밟을 것이다. 저 포기하는 스타일 아니다”라고 했다. 다만 다급한 상황에서 수비수가 넘긴 공을 잘 걷어내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실수처럼 비치는 동작이 나오는 것은 개선해야 한다. 김진현은 “아시안컵에서 3일 간격으로 경기가 열려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말았어야 한다”며 질책했다. 박영수 코치는 “지금도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한쪽을 막고 다른 한쪽을 여는 식으로 수비수들과 훈련을 많이 하는데 앞으로 더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골키퍼는 폭격기처럼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갖고 있지만 주변에 호위 전투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동료 수비수들이 골키퍼를 더 많이 도와야 한다”고 했다.

김창금 기자
무명 김진현은 아시안컵을 통해 골키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그 바탕에는 미터 단위로 뛰면서 골을 노리는 필드의 선수들과 달리 센티미터의 미세한 단위까지 측정해 공을 막아내야 하는 운명을 개척해온 김진현의 의지가 있다. 골키퍼들의 꿈인 대표팀의 넘버원 자리에 오른 김진현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태양계 먼 곳에서 빛이 오기를 기다리는 혜성처럼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이아몬드의 예각을 벼려온 장인이 빛을 봤을 뿐이다.

김창금 기자

▶ 김창금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 말이 있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도 아닌 군대였으니, 여자들은 이런 마음을 알까? <한겨레> 스포츠 기자로 1999년 이후 줄곧 축구 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마음껏 축구 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꿈을 간직해왔다. 스포츠 경제와 스포츠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김양희의 야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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