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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1 18:45 수정 : 2014.08.02 13:48

[토요판] 야구광
슬라이더

▶ 슬라이더는 한때 ‘악마의 구질’이라고 불렸다. 타자를 잘 유혹할 수 있는 구질이면서도 깊게 빠져들면 팔꿈치가 상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최근 들어 류현진(27·LA다저스)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슬라이더에 주목한다. 류현진은 최근 고속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다. 슬라이더는 왜 ‘양날의 칼’이라는 평가를 들을까. ‘야구광’은 ‘축구광’과 번갈아가며 한달에 한번씩 실린다.

<야구란 무엇인가>(레너드 코페트)에서는 피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투구는 인체 구조상 매우 부자연스런 동작이다. 팔은 어깨에서 밑으로 매달려 흔들거리고 팔꿈치는 안으로 굽는 게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것인데 피칭은 그 반대 방향으로 많은 운동량을 부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피칭은 근육과 인대, 관절, 심지어 특정 부위의 뼈에까지 엄청난 부담을 주는 행위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는 것은, 타자와의 승부 이전에 자기 몸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수들은 팔꿈치와 손목, 그리고 손가락을 이용해 다양한 구종을 만들어왔다. 속구(흔히 직구라 통용되는 구종), 커브, 체인지업 등은 20세기 초부터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중반부터는 슬라이더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포크볼, 너클볼 등은 그 이후에 등장했다. 한국 야구사에 슬라이더를 처음 선보인 이는 김영덕 전 빙그레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다가 국내로 들어온 그는, 1964년 실업야구에서 33경기 255이닝을 소화하며 평균자책 0.32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은 “당시 타자들은 ‘이게 무슨 공이지?’ 하면서 헷갈려 하는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이후 장호연, 선동열, 김시진, 김용수, 염종석, 김수경, 조용준 등이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현재는 윤석민, 김광현 등이 슬라이더를 속구 이외의 결정구로 쓰고 있다. 슬라이더는 강속구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구종으로 평가받는다. 속구처럼 날아오다가 휘기 때문에 타자들이 속기 쉽다.

속구처럼 날아오다가 휘어
타자들이 속기 쉬운 슬라이더
투수 부상 위험 크다는 이유로
미국에선 18살 전까지 금지
류현진이 많이 구사하자 걱정

“정석대로 던지면 문제없다”
대부분의 부상은 너무 많은 공
던졌거나 나이 탓이라는 반론
수술사례 역추적 조사에서도
과학적으로 검증된 적 없어

그것은 진정 악마의 구질인가

속구와 커브의 중간형인 슬라이더는 변화구 중 가장 익히기 쉬운 구종이다. 한 야구 책에는 “제구가 문제일 뿐 어떤 투수든 몇 분 내 손쉽게 배울 수 있다”고까지 쓰여 있다. 투수 출신의 양상문 엘지(LG) 트윈스 감독의 말도 다르지 않다. “슬라이더는 일단 변화구 중에 가장 배우기 쉽다. 속구를 던지는 그립으로 공의 측면, 즉 공의 3분의 1 지점에 힘을 가해 던지면 된다. 보통은 속구보다 시속 7~12㎞ 차이가 나는데 타자를 잡기 가장 좋은 구종이기는 하지만 실투가 되면 장타를 허용해서 대책이 없는 구질이기도 하다.” 슬라이더를 던질 때는 보통 중지를 실밥과 나란히 하고 검지를 옆에 붙이지만 투수에 따라 슬라이더 그립은 천차만별이다. 팔 회전은 다트 던지기를 할 때와 비슷하다. 세로로 움직이는 팔에서 팔꿈치만 다시 가로로 꺾어야 한다. 부상 위험은 포크볼이 더 높지만 포크볼은 손이 작은 사람은 던질 수 없다.

미국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발행한 <피칭>이라는 야구 저서에는 “슬라이더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지만 그 대가는 치러야만 한다”고 적혀 있다. 론 기드리가 한 예다. 기드리는 1978년 25승3패 평균자책 1.74의 초특급 성적으로 사이영상(메이저리그에서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날카롭게 꺾이는 슬라이더를 연마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 그러나 슬라이더에 의존할수록 그의 속구 위력은 줄어들었고 1978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에는 그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다. <피칭>은 “슬라이더는 좋은 커브보다 빨리 연마할 수 있다. 하지만 속구와 커브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시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슬라이더는 팔꿈치 인대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공을 놓는 순간 검지나 중지에 힘을 주게 되면서 팔꿈치에 충격이 그대로 전달된다. 검지나 중지를 강하게 눌러보면 그 느낌을 알 것”이라고 했다.

미국 유소년 야구에서는 커브는 만 14살 이상, 슬라이더는 만 18살 이상이 될 때까지는 던지지 말라고 권장한다. 덜 성숙된 관절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커브를 많이 던졌을 때의 부상 위험도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슬라이더는 다르다. 한 미국 대학 연구소에 따르면 일찍 슬라이더를 던진 투수들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상 위험도가 3배가량 높다고 한다.

메이저리그 통계 사이트인 ‘팬그래프닷컴’은 슬라이더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을 때의 부상 위험도를 통계로 보여준다. 팬그래프닷컴이 2008~2010 시즌 동안 샘플로 삼은 680명 메이저리그 투수 중 600여명이 슬라이더를 던졌는데, 이들 중 슬라이더 비율이 40% 이상인 투수는 마이클 워츠(64%), 브래드 리지(54.7%), 카를로스 마르몰(52.9%) 등 25명이었다. 대부분 팀의 구원투수들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25명 중 10명(40%)이 3년 내 수술(10명 중 4명은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다는 것. 한 명은 심각한 어깨회전근 손상 부상을 입었다. 시차가 나기는 하지만 2003년 메이저리그 전체 투수들(700명) 중 10.7%(75명)가 수술했던 것을 고려하면 꽤 차이가 있다. 기간을 3년이 아닌 현역 생활 전체로 확장하면 25명 중 17명이 수술을 받고 2명이 회전근 손상을 입었다. 팬그래프닷컴은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슬라이더를 많이 던지면 부상 위험이 크다고 할 수는 있다”고 했다. 슬라이더 구사력이 뛰어난 에스케이 구원투수 윤길현(31)도 지금껏 3차례나 팔꿈치 수술(인대 접합수술, 뼛조각 제거 등)을 했다. 경기 때 그의 슬라이더 구사율은 50% 이상이다. 윤길현은 “슬라이더가 팔꿈치에 안 좋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슬라이더를 놓는 포인트가 뒤에 있을 때 팔꿈치 관절 부위에 ‘두둑’ 하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보통 시속 130㎞ 이상의 변화구는 어깨나 팔꿈치에 많은 충격을 준다고 본다.

과연 딱 꼬집어서 슬라이더 때문인가

위험성 때문인지 최근 들어 슬라이더 구사가 많아진 류현진을 걱정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엘지 트윈스 투수코치 출신의 차명석 <엠비시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그들 중 한명이다. “슬라이더는 류현진이 국내에서는 잘 안 던졌던 공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팔꿈치 부담을 줄이려 안 던졌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체인지업만으로도 됐기 때문에 굳이 슬라이더를 던질 필요는 없었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구종이 하나 더 필요해서 배운 듯하다. 지금도 완전 슬라이더식이 아니라 팔꿈치 부담이 덜한 커터 식으로 공을 던진다. 현재 잘 던지고 있고 공을 던지기 시작한 초반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수술 경력이 있기 때문에 내년, 내후년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양상문 감독 생각도 비슷하다. 양 감독은 “다른 구종을 많이 던지는 투수가 슬라이더도 많이 던지면 팔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류)현진이의 경우 속구, 체인지업과 달리 슬라이더는 지금껏 던지던 것과 다르게 팔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슬라이더 구사 비율을 10~20% 정도로만 하면 괜찮을 듯도 하다”고 했다.

현역 시절 시속 144㎞에 육박하는 고속 슬라이더로 ‘조라이더’로 불렸던 조용준 <엠비시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슬라이더의 위험성에 반론을 제기한다. 조 해설위원은 “슬라이더가 부상 위험이 높다는 것은 옛날의 잘못된 상식이다. 현역 때 슬라이더를 그렇게 많이 던졌지만 팔꿈치 부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이어 “슬라이더를 던질 때 마지막 동작에서 손바닥이 하늘로 가거나 하면 부상 위험이 있겠지만 정석대로 손등이 9시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던지면 괜찮다”고 설명했다. 역시나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던 진필중 <엑스티엠> 해설위원도 “몸의 성장 과정에 있는 선수들이 많은 구종을 던지다 보면 팔의 변형이 올 수 있고, 부상 위험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지 딱 꼬집어서 슬라이더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투수 출신의 김장백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또한 “슬라이더는 잘못된 투구폼으로 던졌을 때 대미지가 오는 것이지 제대로만 던지면 큰 부상 위험은 없다고 본다”고 했다.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최일언 엔씨(NC) 다이노스 투수코치는 ‘슬라이더’보다는 ‘나이’에 더 주목한다. 염종석, 김수경 등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했던 투수들이 단명한 것은 특정 구질을 많이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고졸 신인으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공을 던졌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최 코치는 “김상진이나 정민철도 마찬가지다. 관절이 아직 덜 완성됐을 때 데뷔해 1년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다 보면 팔꿈치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속구 구속에 맞먹는 고속 슬라이더로 오랜 시간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랜디 존슨은 만 24살 때 빅리그에 데뷔했다. 반면 똑같이 슬라이더로 주목받았던 케리 우드의 데뷔 시기는 21살이었다. 존슨이 45살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간 반면 우드는 34살 때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슬라이더 구사 능력이 뛰어난 에스케이 우완 구원투수 윤길현의 슬라이더와 속구 투구 변화. SK 와이번스 제공
윤길현은 슬라이더를 던질 때 손을 약간 비튼다. SK 와이번스 제공
강속구 때문에 인대 접합수술 받는 경우 많아

몇 년 전부터 투수들은 마운드를 내려온 직후 곧바로 회복운동과 보강운동을 해서 팔꿈치 부상 위험을 줄여가고 있다. 두산 강흠덕 트레이너는 “보통 투수들이 공을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사용한 근육이나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풀어주는 식으로 보강운동을 한다. 한 동작을 20차례 정도 총 15분 안팎 한 뒤 아이싱을 하게 된다”고 했다. 가끔 경기 중에 더그아웃에서 투수들이 팔운동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는데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김시진 감독은 “보강운동을 많이 하고 남발만 하지 않는다면 슬라이더는 꽤 괜찮은 구종이다.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쓰겠다고 생각하면 한 타석당 한 개만 던지는 식으로 전체 투구의 10% 안팎으로 조절하면 부상 위험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류현진의 팔꿈치 수술을 집도했던 서울 김진섭정형외과의 김진섭 원장 생각은 어떨까. 김 원장은 “속구와 비교해 슬라이더를 던졌을 때 어깨 통증은 40%, 팔꿈치 통증은 60% 정도 증가한다는 논문은 있다. 하지만 슬라이더가 내측부인대(MCL)를 손상시킨다고 생태역학적으로 증명된 사례는 없다”고 했다. 경험상 슬라이더가 팔꿈치에 해를 가한다는 심증은 있는데 과학적 증명은 아직까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원장은 “지난 20여년 동안 수술받은 선수들을 역추적한 결과 오히려 강속구를 많이 던져서 인대 접합수술을 받은 사례가 더 많았다. 확실히 빠른 공을 던지고 잘 던지는 사람일수록 인대 손상은 더 많이 온다. 역학적으로 보면 140㎞의 슬라이더는 155㎞의 강속구와 비슷하다”고 했다. 류현진에 대해서는 “수술 뒤 8~9년 동안 매해 체크해왔는데 괜찮았다. 근육의 피로도에 따라 팔꿈치에 약간의 염증은 올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 비율을 늘린다고 해서 인대가 재파열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소견을 냈다.

슬라이더는 악마의 구질일까. 분명한 것은 투수들은 공 하나를 던지기 위해 자기 몸의 희생도 불사한다는 사실이다. 김시진 감독을 비롯해 여러 투수들(혹은 야수들도)의 곧게 펴지지 않고 굽은 팔이 그 증거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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