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29 19:22
수정 : 2017.12.30 11:06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 드라마 <도보 7분>
32살의 구로사키 요리코(다나카 레나)는 얼마 전 생애 첫 독립을 했다. 말이 독립이지, 집은 부모에게 빌린 돈으로 얻었고 생계를 이어갈 직업도 없다. 옆집 티브이 소리까지 다 들리는 좁은 아파트에서 요리코는 종일 누워 지낸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그리워 집까지 찾아가 울거나 끼니를 때울 도시락 가게를 찾을 때를 제외하고는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좀처럼 없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동생마저 갑자기 꿈을 찾겠다며 유럽으로 떠나버린다. 곧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데 요리코의 시간만 멈춰 있는 듯하다.
일본의 젊은 작가 세대를 대표하는 마에다 시로 각본의 8부작 드라마 <도보 7분>은 한없이 무기력한 청춘의 모습을 초저속으로 그려내는 작품이다. 제목은 ‘요리코가 사는 아파트에서 도보 7분 거리 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라고는 기껏해야 이웃, 도시락 가게 등이 전부다. 꿈도, 의욕도, 열정도 없는 요리코의 모습 위로 사토리 세대와 같은 일본 청년 문제가 겹쳐지지만,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부감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대부분 방 안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요리코의 위치에 시선을 맞추고 반복적인 일상을 조용히 지켜본다. 전개 속도는 거의 정체에 가깝고 갈등의 고저도 없으나 계속 보다 보면 이러한 묘사가 오히려 청년 문제의 핵심에 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요리코의 좁고 더딘 ‘7분 거리’의 세계는 청춘에게 주어진 삶의 제한된 가능성을 의미한다.
<도보 7분>이 더 인상적인 것은 이 같은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는 사회가 보기에 잉여나 루저와 다름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시선의 미덕이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요리코에게 동생이 선물한 선인장 화분이다. 동생의 옛 애인이 남기고 갔다는 그 식물은 5년째 아무런 변화가 없어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동생의 말처럼 선인장은 현재 요리코의 상태와 꼭 닮아 있다. 그러나 다른 시선으로 보면 이 볼품없고 느리게 자라는 식물은 사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외양과 성장 속도로 메마른 사막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요리코와 같은 저성장 시대의 청춘들 역시 ‘겨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실은 세상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던진다.
이는 국내의 청춘들에게도 절실한 위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탈진 세대’라 불릴 정도로 번아웃 증후군이 가장 심각한 세대다. 꿈과 성장은커녕 삶의 의미가 ‘생존’으로 축소된, 이 극한 상황을 버텨내는 모든 삶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도보 7분> 후반부에서 5년 만에 꽃을 피워낸 선인장을 향해 요리코는 진심으로 감탄을 보낸다. “존재감 없는 식물이었는데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한 해를 무사히 버텨낸 이들에게도 응원을 건넬 시간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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