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03 20:01
수정 : 2017.11.04 13:2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투 빅 투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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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에이치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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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리먼브러더스 회장 리처드 풀드(제임스 우즈)는 뉴스를 보던 중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수신인은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윌리엄 허트)이었다. 그는 리먼의 상황이 뉴스 보도만큼 나쁜 것은 아니며 ‘세계 최고 갑부’ 워런 버핏(에드워드 애즈너)의 말 한마디면 신용이 회복될 것이라 말한다. ‘재무장관으로서 특정 투자사를 지지하는 말을 할 수는 없다’던 폴슨도 뒤로는 버핏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막상 버핏이 거래를 제안하자 풀드는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만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경영위기로부터 회사를 구한” 바 있는 그는 이번에도 “폭풍은 항상 지나가는 법”이라며 상황을 낙관한다. 하지만 그 뒤에 온 것은 다 알다시피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라는 대재난이었다.
올해로 세계 금융위기 발생 10년째, 국가 파산 위기는 막아냈지만 여전히 그 후유증이 남은 미국에서는 이를 소재로 하는 영화, 드라마, 책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에이치비오>(HBO) 채널이 2011년 선보인 티브이 영화 <투 빅 투 페일>(Too Big to Fail)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타계한 명감독 커티스 핸슨 특유의 서늘하고 정밀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약 6개월간의 금융위기 전개 상황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뜻의 제목은 당시 탐욕스러운 운영으로 금융위기를 자초한 월가 대형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말로 자주 사용됐다. 고급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으로 위기를 무마하려던 리처드 풀드의 느긋한 모습을 담은 드라마 도입부는 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위기로부터 시작하나, 진정한 출발점은 오프닝을 장식한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에 있다. 로널드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 정책 발표를 바라보는 드라마의 냉정한 시선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겸업 허용으로 금융업계의 승리를 가져다준 빌 클린턴의 모습을 거쳐, 전 국민의 주택 자가소유를 강조하며 저금리 대출을 확대하는 조지 부시의 모습에서 냉소의 정점을 찍는다. 특히 부시의 “전 아메리칸드림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드라마 내내 부정당하며 미국 금융시장 성공신화의 허상을 드러낸다. 일각에서는 드라마가 구제금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폴슨을 미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미국 금융시스템의 건강함을 주장하다가 배반당하는 그의 표정 위로 스쳐지나간 것은 분명 조지 부시의 그 모순된 연설이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발발 이후 20년째를 맞았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언급됐듯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외환위기의 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이를 정면으로 돌아보며 성찰을 환기하는 대중 서사물은 드물다. 외환위기에 대한 대중문화적 상상력은 대부분 소설 <아버지> 신드롬이나 최루성 복고물에 머물러 있다. 오랜 후유증은 사회 전체의 성찰 부족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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