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07 19:28
수정 : 2017.04.07 21:02
[토요판]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굿파이트>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기 시리즈 <굿와이프>가 종영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준 건 스핀오프 제작 소식이었다. 더구나 그 주인공이 다이앤 록하트(크리스틴 버랜스키)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굿와이프>의 주인공 얼리샤(줄리아나 마걸리스)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제적 히로인이어서 흥미로웠다면, 다이앤은 정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전형적인 페미니스트 영웅으로서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우려되는 점은 얼리샤가 시즌 전체를 통해 ‘좋은 아내’의 억압적 수식어를 벗어던지고자 노력한 성장형 캐릭터인 것과 달리, 다이앤은 처음부터 완성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난 2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굿파이트>는 다이앤이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설정을 통해 이야기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는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을 바라보는 다이앤의 ‘멘붕’ 표정으로 시작한 첫 장면부터 골수 민주당 지지자 페미니스트로서의 깊은 회의를 보여주더니,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는 평생 쌓아온 변호사 커리어마저 위기에 빠트린다. 은퇴한 뒤 자서전을 쓰면서 삶을 재충전하려던 계획이 모두 무산된 것이다. 믿었던 투자자의 사기 사건으로 기본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압류당했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세운 로펌의 공동파트너들은 권력을 나눠 가질 생각이 없다며 은퇴 번복마저 거부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별거 중이나 애정이 남아 있었던 남편 커트 맥베이(게리 콜)와의 이혼도 확실히 매듭지어야 한다.
“어떻게 내 삶이 이렇게 의미 없어진 거지. 이렇게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았는데 남은 게 없어. 친구조차 없어.” 완벽해 보였던 다이앤의 삶은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다이앤에게 지금까지의 인식 세계를 보다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다이앤의 백인 기득권 중심 로펌과 대결했던 흑인 로펌 대표 바버라 콜스태드(에리카 태즐)의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삶에 ‘너무도 자신만만했던’ 태도를 돌아볼 기회다. 이러한 다이앤의 위기와 새로운 각성은 얼리샤의 수난을 환기시키며 여성의 사회적 재기를 그리는 시리즈의 주제를 이어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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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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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굿파이트>는 얼리샤 원톱 성장물이었던 <굿와이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흥미로운 여성 연대 서사를 그려 나간다. <굿와이프>에서 지적이고 냉철한 매력으로 호평받았던 흑인 변호사 루카 퀸(쿠시 점보), 다이앤의 젊은 시절을 닮은 듯한 신입 변호사이자 레즈비언인 마이아 린델(로즈 레슬리) 등의 주요 캐릭터가 다이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대, 인종, 젠더를 아우르는 연대의 기대감을 높인다. 초반의 완성도가 끝까지 이어진다면 원작을 뛰어넘는 스핀오프 사례로 충분히 기억에 남을 만하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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