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15 19:48
수정 : 2016.07.15 20:0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한중미드라마 <드라마월드>
A라는 인물이 B에게 반한다. 그는 원래 C에게 구애 중이었다. 그런데 B는 C의 과거 남자 D에게 마음이 있다. 여기에 D를 연모하는 E와 E를 짝사랑하는 F가 가세하면서 인물 관계는 끝없이 꼬인다. 2005년 방영된 문화방송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의 한 장면이다. 무려 12각관계를 그려낸 이 부분은 당시 드라마가 남발하던 삼각, 사각 관계의 진부한 러브라인을 풍자한 명장면으로 아직도 회자된다.
이미 십년 전에 패러디 대상이 될 정도였던 한국 드라마(한드)의 상투성은 지금은 더 심해졌다. 다각관계는 기본이고 재벌, 불치병,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교통사고 등 뻔한 설정의 목록은 갈수록 길어진다. 패러디물도 계속해서 등장했다. 문화방송 <무한도전> ‘쪽대본 특집’,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의 ‘끝장 티브이(TV)’와 ‘시청률의 제왕’, 에스비에스 <드라마의 제왕> 등 패러디만으로도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다.
최근 이러한 한국 드라마 패러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등장했다. 한국, 미국, 중국이 합작하고, 글로벌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비키에서 공개한 웹시리즈 <드라마월드>다. 이른바 한드의 열성팬인 미국 대학생이 우연히 드라마 속으로 차원 이동하면서 일어나는 소동을 그린 이 판타지코믹멜로물은 한드의 관습을 마음껏 비틀고 유희한다. 한류가 확대되면서 해외팬들이 정리한 한드의 전형적 특징들이 종종 화제가 되어온 가운데, 이를 좀 더 완성도 높은 본격 패러디물로 탄생시킨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주인공 클레어(리브 휴슨)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대학생으로, 한드 시청이 유일한 낙이다. 어느 날 신비한 힘에 이끌려 한드의 세계 ‘드라마월드’ 속으로 들어오게 된 클레어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곳이 위기에 빠져 있음을 알고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한드의 진부한 설정이 낱낱이 패러디되는데 단순히 웃음 요소에 그치지 않고 진지한 비평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다. 급작스런 교통사고, 뜬금없는 복근 노출 샤워신, 뒤바뀐 가방이나 소매치기 사건으로 엮이는 남녀 주인공 등 작위적인 장면들의 재연이 코미디를 담당한다면,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과 구해주는 남주인공, 억압적인 부모처럼 플롯 안에 스며든 전근대적 요소들은 반성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월드>는 마냥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작품만은 아니다. “드라마 속에선 인생이 즐겁단 말야. 누구라도 예뻐질 수 있고, 누구라도 진정한 사랑에 빠질 수 있어”라는 클레어의 말처럼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한드의 판타지’에 대한 애정 위에서 출발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네가 사는 세상은 어떤데?”라는 드라마 속 인물의 물음에 클레어가 “시궁창이야. 결말이 어떻게 날지 아무도 몰라”라고 답하는 장면은 판타지의 근본적 기능과 그에 몰입하는 이들에 대한 공감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판타지는 현실의 반대말이 아니다. 고된 현실을 치열하게 자각하는 이들일수록 판타지는 더욱 필요하다. <드라마월드>는 그러한 판타지의 위로적 기능에 보내는 경쾌한 찬가 같은 작품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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