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14 18:15
수정 : 2007.01.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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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르 카셈/팔레스타인 나자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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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처형 방식에 당혹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사실 미국은 그를 빨리 제거해야 할 강력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 미국은 “미숙하고 비인도적인” 처형 방식을 지적했지만, 후세인을 구금하고 있다가 집행 몇 시간 전에 이라크 당국에 넘겨준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문명화된” 처형을 위한 사전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교수형 집행자들의 두드러진 종파(시아파)적 행동들은 종파분쟁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라크를 24년 동안 통치한 수니파 출신의 후세인은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시아파한테 잔인한 독재자로 낙인찍혀 있다. 후세인의 잔인성은 종파를 가리지 않았지만, 시아파는 수니파 전체한테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은 재판 과정에서 제기될 민감한 문제들 때문에 그의 제거를 간절히 원했다는 점이다. 후세인은 국제적 파장과는 상관없는 이라크의 작은 마을에서의 학살사건 때문에 교수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와 연관된 다른 사건들은 더 큰 국제적 파장을 낳은 것들이다.
첫째, 이라크 법원은 1988년 쿠르드족 마을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화학무기 공격인 ‘안팔작전’에 대한 심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쿠르드인 수천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작전 명령자는 후세인일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에 당시 이라크군 무장을 도운 미국의 역할에도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82년 이란과의 전쟁을 위해 이라크를 동맹으로 삼았다. 미국은 걸프지역 나라들로 하여금 후세인을 재정적으로 돕도록 했고, 서방국들한테는 군사원조 확대를 요구했다.
82년 이전 후세인에게는 화학무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화학무기 제조법과 장비를 제공했을까? 당시 이라크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모든 정보에 접근했던 미국은 화학무기 개발을 몰랐을까? 알았다면 사용을 왜 막지 않았을까? 그리고 화학무기 사용 이후 미국의 반응은 왜 미적지근했을까?
후세인만이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한테 매우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둘째, 이란-이라크전 문제다. 미국은 왜 후세인을 부추겨 이란과 전쟁을 하게 했을까? 아랍국가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유럽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미국은 무엇 때문에 유혈 참사와 잔학 행위를 지켜보면서도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원했을까?
후세인은 자세한 답을 알고 있고, 그의 죽음은 미국을 안도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셋째, 쿠웨이트 침공 문제다. 90년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문제에서 미국의 역할이 밝혀져야 한다. 일부에서는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가 후세인한테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강한 암시를 줬다고 주장한다. 왜 미국은 후세인이 쿠웨이트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는데도 미온적으로 대응했을까? 미국은 걸프지역 군사력을 크게 늘리고자 후세인의 침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넷째, ‘석유-식량 프로그램’ 문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를 국제적으로 포위하기로 결정한 뒤, 유엔은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유엔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감독하면서 이라크인들의 식량을 마련하는 데 쓰이는 대금을 통제했다. 그런데 석유의 상당 부분이 잘못 쓰였고, 수출대금은 부패의 먹잇감이 됐다. 누가 이라크인들의 돈을 빼먹었을까?
이런 물음은 후세인의 조기 처형 과정에서 미국의 구실에 큰 의심을 품게 만든다. 심문과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형을 집행하는 것은 사법적 관점에서도 용인되지 않는 일이다. 후세인은 분명히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고, 아주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행위들의 역사적 전개를 서술하는 데 큰 구실을 해야 할 인물이었다.
사타르 카셈/팔레스타인 나자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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