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7 17:58
수정 : 2006.12.1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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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칭보/중국 월간 <당대>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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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1990년대 중반 중국인들은 <포레스트 검프> <다이 하드> <트루 라이즈>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미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빠졌다. 이들 영화는 엄청난 투자, 거대한 규모, 첨단기술을 이용한 특수효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미국 영화는 이 시기 마치 날개를 단 호랑이 같았다. 중국 영화는 이들 앞에서 철저히 몰락했다.
21세기 초 한국 문화가 중국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한류’라는 말이 생겨났다. 가장 먼저 한류에 빠진 이들은 청소년과 부녀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의 오락성 짙은 대중문화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한국 대중가요와 <대장금> 따위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류는 중국의 사상문화계까지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랫동안 한류는 통속문화의 동의어였다.
이런 한류에 대한 인상을 바꾼 게 한국의 블록버스터들이다. 한국은 영화대국이다. 중국에서 한국 영화의 점유율은 미국 블록버스터 다음간다. 유럽과 홍콩, 대만을 합쳐도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국 영화는 절대다수가 오락물이어서 예술성과 사상성을 함께 갖춘 것은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에 본 몇 편의 한국 블록버스터는 이런 편견을 바꾸게 했다.
<실미도>는 이전 한국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줬다. 냉전 시기에 훈련된 킬러들이 갑자기 효능이 없어지자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교관은 이들을 차마 죽이지 못한다. 포위망을 뚫고 청와대로 향한 킬러들은 마지막에 죽음으로써 냉전의 폭력성을 규탄한다. 나에게 이처럼 복잡한 감정과 깊은 사회의식을 드러낸 한국 영화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요소들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진정 독창적인 한국 블록버스터다. 1950년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묘사한 이 영화는 한국판 <사랑과 평화>라고 할 만하다. 전쟁과 평화 속에서 흔들리는 민족의 운명을 비장하게 그렸다. 이 영화에서 중국 관객에게 제일 민감했던 것은 전쟁의 성격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이었다. 이 영화는 전쟁의 원인을 추궁하지 않았다. 중국 관객은 이 영화가 반공이나 반중국이 아니라 반전을 표현한 데 안심했다.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웰컴 투 동막골>의 전쟁 묘사는 더욱 복잡하다. 서로 총을 겨누던 군인들이 낙오해 동막골이라는 작은 마을로 흘러든다. 이들은 한적한 전원생활과 소박한 민심에 감화돼 적대적 관계를 정화한다. 이 영화의 뛰어남은 마지막에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데 있다. 이는 이제까지 본 반전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결말이다.
<한반도>는 가장 블록버스터다운 한국 영화다. 이 영화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역사를 보는 태도는 괄목상대할 만하다. 일본을 두고 맞서는 대통령과 총리는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총리를 매국노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매국의 논리에 단호히 반대하면서도 이를 단순하게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런 접근은 중국인들에게 생소하다. 중국인들은 역사상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천 년이 지났어도 매국노 진회의 동상은 애국자 악비의 사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미국 블록버스터의 영향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중국인들에게 직접적이진 못하다. 예컨대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항일전쟁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쟁영웅들을 그린 <낭아산의 다섯 장사>를 찬미하는 중국인들에겐 불가사의하다. 한국의 블록버스터는 다르다. 한국과 중국은 많은 데서 경험을 공유한다. 한국 블록버스터의 영향은 중국인들에게 직접적이다.
훙칭보/중국 월간 <당대>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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