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창이 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
세계의창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노동자들은 병 치료를 받을 때 지갑을 열 필요가 없었다. 당시 중국은 공유제였고 사기업은 없었다. 기업체 직원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에 속했고 중국 사회의 ‘지도 계급’이었다. 생로병사와 의식주를 모두 ‘단위’(국영·집단기업)에서 책임졌다. 가족들도 직원의 이름으로 병을 치료하고 약을 탔으며, 모든 비용을 단위에서 떠맡았다. 글쓴이의 아버지는 탄광노동자였다. 어릴 적, 식구 가운데 누구도 병 치료에 돈을 써본 기억이 없다. 이 때문에 노동자 계급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느낌’은 서서히 변해갔다. 1980년대 이후 의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돈을 내야 했다. 먼저 돈을 낸 뒤 이 비용을 기업에 청구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공유제 기업은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노동자 의료비용은 늘 제때 지불되지 않았고, 두서너 달 또는 두서너 해 밀렸다. 기업이 문을 닫아 영원히 지불되지 않는 일도 생겼다. 이 시기부터 노동자의 공공의료는 물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었다.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느낌’ 또한 엷어졌다. 개혁·개방이 더 진행되면서 적지 않은 공유제 기업이 파산하거나 문을 닫은 뒤 신흥 부자들한테 헐값에 팔려나갔다. 공유제 기업의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리다 실업자로 떨어지거나 사기업의 일용노동자로 변신했다. ‘공공 의료’는 역사 용어로 변했으며, ‘물속의 달, 거울 속의 꽃’조차 사라졌다.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라는 느낌’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임금도 제대로 못 주는 국유기업들은 의료보험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30~40년 동안 사회주의 중국 건설에 땀 흘린 국유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해 의료·양로 등 모든 복지 부담을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 하는 것은 인정상으로나 이치상으로나 너무 잔인한 조처다. 몇천억 위안에 이르는 의료보험 자금 부족 때문에 당시 주룽지 총리는 머리를 싸맸다. 그는 국유자산을 팔아 사회보험 재정을 메우려 했다. 그러나 국유기업 매각 수입은 겹겹이 쌓인 탐관오리들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주 총리가 물러나자 국유기업 노동자 의료보험은 공중누각으로 변했다. 이 시기 노동자 가정에서 누가 큰 병이라도 들면 “하늘을 부르고 땅에 호소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글쓴이는 1990년대 가족과 함께 고향 쓰촨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 연배의 수많은 늙은 탄광노동자들이 버려진 탄광과 함께 황량한 산골짜기에 버려져 있었다. 이들은 탄가루와 돌가루에 긁히고 다친 폐로 어렵게 숨을 쉬며 묵묵히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경제는 비약했고, 국가는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다. 국고는 충실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21세기 사회보장을 건립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세대의 국유기업 노동자 계급은 이미 희생당했고, 새로운 사회보장제도의 머릿돌 아래 묻혀 있다.오늘날 중국 정부는 기업이 의무적으로 노동자 의료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려 한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이 각종 구실을 대며 이 부담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국유든 사영이든 중국에서 의료보험 가입 노동자는 여전히 극소수다. 의료보험에 가입했더라도 아직 보장수준이 너무 낮은데다 이윤만을 노리는 병원의 횡포가 여전해,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고 약을 먹을 수 없는 노동자가 여전히 절대다수다. 이 노동자 의료의 변천사가 오늘날 사회주의 중국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설명해주는 단면도가 될 수 있다. 저우창이 중국 월간 〈당대〉편집인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