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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6 20:21 수정 : 2006.06.26 20:21

저우창이 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세계의창

농지의 주인이 되어 자기 땅에서 소출을 거두는 것은 하늘 아래 농민의 가장 높은 이상이다. 이 때문에 농민 출신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은 ‘지주를 타도하고 농지를 분배하자’는 토지혁명의 구호로 중국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신중국 건국 뒤 가난한 농민들은 모두 한 조각씩 토지를 나눠받아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유감스럽게도 공업혁명을 위해 모든 토지를 다시 국유로 만들었다. 중국 농민은 이제 땅의 주인도 아니고 ‘소작농’도 아닐 뿐아니라 아무런 소유도 없는 ‘농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즈음 ‘땅주인’(지주)이란 말은 인간쓰레기의 대명사로 불렸으므로 농민들은 땅주인이 될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자기 땅이 아닌 까닭에 농민들은 자연히 게을러지고 수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관리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식량 생산량을 허위로 보고했다. 200평당 50㎏ 생산하면 5000㎏ 생산했다고 보고됐다. 상급 정부는 허위 보고된 생산량을 근거로 식량을 분배했고, 이 때문에 인민공사 집단식당의 ‘큰솥’ 안에는 밥이 금세 다 없어졌다. 천재까지 겹쳐 1960년대의 대기근 때는 수천만의 농민이 굶어죽었다. 들판마다 주검이 널렸고, 한 마을이 몽땅 굶어죽어 주검을 묻어줄 사람조차 남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농민들은 굶주림을 견딜 수 없어 비밀 집회를 열어 토지를 촌민들에게 개인 분배를 하기로 비밀결사를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덩샤오핑은 이를 전국 범위로 확대해 ‘토지 임대 경작제’를 시행했다. 10억의 중국 농민은 ‘농업 노동자’에서 다시 ‘소작농’으로 진보했다. 인민공사와 달리, 무엇을 심고 어떻게 물을 대며 언제 거둘 것인지를 모두 농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 농민은 아직도 땅의 주인이 아니다. 이들이 정부와 맺은 것은 ‘토지 임대경작 계약’이어서 사용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없다. 중국 관료들이 보기에 이런 임대경작 계약이란 휴짓조각과 같아서 찢어버리고 싶으면 언제라도 찢어버릴 수 있다. 90년대부터 중국은 요란하게 ‘도시화’를 추진했다. 부동산 개발은 지방의 착한 관리에겐 정치 성적표를, 탐관오리에겐 폭리를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도시 부근의 토지는 거의 예외 없이 잠식당했다. 그 결과 1억이 넘는 농민들이 소작농 자격조차 상실했다. 이들은 몇 푼 안 되는 철거 보상비용을 손에 쥐고 아무런 대책 없이 땅에서 쫓겨났다.

농민들은 토지를 지키고자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철거용 굴착기와 불도저에 맞섰고, 몇몇 농민들은 베이징으로 올라와 언론매체와 중앙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한 손으로 해를 가리는 걸 막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결국 지난해 6·11 사건이 발생했다. 지방 관리들의 조종을 받은 수백명의 폭력배들이 베이징에서 허베이성 딩저우까지 장거리 원정을 와 한밤중에 토지를 지키던 농민 6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100여명을 상하게 하는 참극을 연출했다.

중국식 ‘인클로저 운동’의 광풍이 극심해짐을 볼 때, 토지를 잃은 농민이 사회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볼 때, 날로 줄어드는 경작지를 지키는 일은 농민만의 책임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책임이 되었다. 개혁이 성숙함에 따라 중국 농민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갈구했던 ‘땅의 주인이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자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니, 이미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저우창이 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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