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4.26 18:49 수정 : 2006.06.09 16:30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철학

세계의창

독도를 둘러싼 당면한 위기는 넘겼다. 두 나라가 영토 주권을 둘러싸고 충돌하는 사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며,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게 당연하다. 일본 쪽에 결여된 것은, 독도가 일찍이 한반도 침략의 첫걸음이었다는 한국 쪽의 역사인식에 대한 이해다.

그동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높은 지지율을 떠받쳐온 요인의 하나가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는 총리’라는 이미지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 전형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다. 1980년대 강경파·국가주의자의 이미지를 가졌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조차 ‘근린 제국과의 관계를 배려해’ 공식 참배를 중단했다. 그런데 고이즈미 총리는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한·중뿐이다. 마음의 문제에 타국은 개입할 수 없다”며 반격을 했다. 전에는 없었던 ‘한·중과도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총리’라는 것이 일본인의 ‘자존심’을 부추겼다.

‘일본은 전승국한테 거세돼 자기주장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학적인 나라가 됐다.’ 이런 얘기는 이전부터 일부 우익이 반복해 왔지만, 지금은 이에 가까운 인식을 보통 시민이나 미디어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상당수 젊은이는 자국의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겐 일본이 언제나 중국·한국·북한에 대해 저자세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한·중으로부터 과거를 추궁당하면, 발뺌 정도가 아니라 굽실거리며 사죄를 반복한다. 그런 일본은 꼴불견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일본이 전후 다른 나라에 언제나 저자세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에 대해서도, 한-일 기본조약을 포함해 최근까지 식민지배 책임의 인정을 강경하게 거부해 왔다. 90년대 활발히 제기됐던 전후보상 청구에 대해서도 ‘끝난 문제’라는 견해를 완강하게 지키고 있다. 이런 현실은 일본 안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으로 ‘언제까지나 굽실거리며 사죄하는 볼썽사나운 일본’에 대한 혐오감이 내셔널리즘 대두의 한 요인이 돼 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일본인들에겐 ‘볼썽사나운 일본’과 ‘멋진 일본’의 양자택일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구도가 형성되는 한 요인은 일본 정치가의 자질, 나아가 일본 정치문화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국의 과거 잘못을 직시해, 그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과거의 반성에 근거해 다른 일본으로 바꾼다. 그러니 믿어달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동과 함께 주변국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위정자가 나온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독일과 일본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점에 관한 차이는 크다. 독일 패전 직후,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죄의 문제〉를 썼다. 그는 아무리 괴로워도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죄를 받아들여 속죄하는 것이 독일인의 긍지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자국의 죄를 직시·자성해 책임을 ‘주체적으로’ 맡는 것, 그리고 그 반성의 토대에서 새로운 독일을 만드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 총리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그런 메시지를 결정적 장면에서 결정적 형태로 표명했기 때문에 세계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됐다.

일본 총리는 이미 몇 번이나 사죄했다고 하지만, 한·중 국민들의 기억에 남아 구전될 정도로 충분히 명확하고 성실한 메시지가 표명된 사례는 지금껏 없었다. 과거 잘못의 책임을 깨끗하게 받아들여 ‘새로운 일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정치 지도자가 나올 것인가. 그것은 일본 시민사회의 성숙에 달렸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철학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계의 창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