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29 18:38
수정 : 2015.11.29 18:38
지난 26일 여의도에서 김영삼(이하 와이에스)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열렸다. 판문점에서는 8·25 합의 후 석달 만에 실무회담이 어렵사리 열려 12월11일 개성공단에서 차관급 남북당국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와이에스 영결식 날 남북회담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에, 날이 날인지라, 21년 전 대통령 통일비서관으로서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1993년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그 후 이듬해 6월까지 한반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북한이 ‘불바다’ 발언을 쏟아내고,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지친 미국이 영변 핵단지 폭격 계획까지 세웠기 때문이다. 이때 김대중(이하 디제이) 아태재단 이사장은 94년 5월12일 미국기자협회(NPC) 연설에서 카터 전 미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 군사충돌을 막을 묘책을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받아들여 카터가 6월15~18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꺼냈다. 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의 설명을 듣고 와이에스가 그 제안을 수락해 남북정상회담이 극적으로 합의됐다. 한반도 상황이 급반전했다. 회담 날짜는 7월25~27일, 장소는 평양으로 결정됐다. 디제이-카터-와이에스의 삼각공조로 우리 국민들이 전쟁 공포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한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지만, 인구 절반이 사는 수도권이 북한의 대남 군사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반면, 북한은 그동안 군사분야 투자를 많이 한 탓에 군사력은 강해도 주민생활은 식량조차 부족할 정도로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서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와이에스는 북한의 핵포기와 대남 군사위협 중지를 요구했을 것이고, 김일성은 일단 자주·평화·민족대단결 논리를 전개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수용 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도 결국 실용주의 입장에서 경제협력과 군사긴장 완화 협의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무진들은 그런 전망을 토대로 회담 운영 전략과 공동선언 내용을 정리해 상부에 보고했다.
회담 준비팀은 경제협력을 지렛대로 삼아 북한의 대남 군사위협을 완화시켜 나가면서 긴장완화-평화공존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김영삼-김일성 7·27 공동선언’의 골자는 “경제협력과 다방면적 교류를 통해 군사긴장을 완화시켜 나가자”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5년에 시작해서 마침내 동서 유럽의 평화를 가져온 ‘헬싱키 프로세스’가 이런 구조였다. 이렇게 해서 ‘7·27 공동선언’이 탄생했더라면 그건 결국 후일의 6·15 선언, 10·4 선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누가 남북정상회담을 하더라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이 그해 7월8일 급서하지 않고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리고 ‘7·27 공동선언’이 나왔더라면 이후 남북관계는 어땠을까. 우선 추진력 강한 와이에스가 남은 임기 3년7개월 동안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관계를 ‘확실히’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71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남북 교류협력을 주장해온 디제이가 와이에스의 후임 대통령이 되어 임기 초부터 남북관계를 더욱 발전시켰을 것이고, 햇볕정책 계승을 공언한 노무현 대통령도 그 방향으로 나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1994년 7월27일부터 2008년 2월24일까지 만 13년7개월 동안 남북경협과 긴장완화가 연계되면서 남북관계 개선이 구조화됐더라면 보수성향의 후임 대통령도 그 흐름을 뒤집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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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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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7월9일 김일성 급서 소식을 보고받은 와이에스의 첫 반응은 “아쉽다!”였다. 분단국 대통령다운 코멘트였다. 통일부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남북관계가 안 풀리다 보니 21년 전 정상회담 무산이 그때보다 더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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