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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7 17:04 수정 : 2019.08.08 14:19

손아람
작가

부모님은 오래도록 거실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다. “볼만한 게 없어서”라고 하셨다. 단방향 방송 시대의 시청자가 취향을 주권적으로 행사하는 방법은 텔레비전을 거부하는 것뿐이었다. 텔레비전을 트는 순간 선택권은 무의미해진다. 내가 보는 시간대의 방송은 오로지 나를 위해 편성된 것이 아니니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완전히 결정하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조차 천천히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랬던 어머니는 주문형 비디오 시청이 가능한 아이피티브이(IPTV) 시대가 열리자마자 열렬한 텔레비전 마니아로 돌변했다. 월정액을 끊어두고 제공된 영화가 바닥날 때까지 시청하는 어머니를 위해 환갑 선물로 약속했던 빔 프로젝터를 거실에 설치해드렸다. 내장 앱으로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설치된 제품이었다. 어머니가 넷플릭스를 좋아하게 될 거라 확신했지만, 평생 텔레비전을 보지 않던 아버지가 유튜브에 빠져들 줄은 몰랐다. 음반 수집가인 아버지는 유튜브로 공연 영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자 거실 여기저기에 쌓아뒀던 음반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급기야 하이파이 앰프에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던 스피커 케이블을 빔 프로젝터가 빼앗아 차지하게 됐다. 온라인으로 결제 한번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술맹인 부모님이 온라인 방송에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국내의 인터넷 기반 방송 서비스(OTT)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국내 방송통신 사업자들은 폐쇄적인 환경의 단말기 위주로 온라인 콘텐츠를 공급한다. 선택권을 원천봉쇄해야 소비자의 돈이 경쟁자에게로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아이피티브이의 셋톱박스로는 넷플릭스를 볼 수 없다. 지상파 방송 콘텐츠를 보려면 ‘푹’을 사용해야 하는데 푹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전용 기기를 구입해야 한다. 씨제이 콘텐츠를 보려면 ‘티빙’을 사용해야 하고, 티빙은 또 다른 전용 기기를 요구한다. 각각의 전용 기기에서는 다른 사업자의 유료 서비스 사용이 제한된다. 심지어 개별 사업자가 인증한 티브이박스조차 기기마다 지원 범위가 다르다. 어떤 기기에는 핵심 채널이 더러 빠져 있고, 어떤 기기에는 실시간 방송 기능이 빠져 있다. 모든 사업자가 포기할 수 없는 개방 플랫폼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만이 소비자 입장에서 손해 보지 않는 방법이지만, 내 부모님 같은 기술 취약 계층에게 리모컨 수준의 복잡성을 넘어서는 사용자 환경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같은 데이터 전송량을 사용하는 똑같은 영상을 본다 해도 시청 기기가 모바일인지 컴퓨터인지 텔레비전인지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괴상한 요금제가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익 창출의 방해 요소를 강매하는 상품으로 제거하는 사업 모델이다. 소비자 주권이 최소가 되어야 공급자 이익이 최대가 된다는 믿음 위에서 작동하는 국내 사업자들은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글로벌 사업자의 시장 잠식을 막기 위해서는 사업의 배타성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지만, 정작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시장 독점적 지위는 독점 사업이 아닌 웹 기반 서비스의 탁월한 접근성과 개방성으로부터 얻어졌다. 지역 비디오 대여점과 회원끼리 동영상을 돌려보는 비공개 웹사이트로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두 회사는 취급하는 상품이 아닌 사용자 편익 환경을 선점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택의 여지를 없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할 필요를 없앴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방송통신사들이 전형적인 독점과 배제 전략을 구사하는 건 아쉬운 일이다. 독점은 어떤 식으로도 좋은 일이 아니지만, 소비자가 기업의 독점에 일조하는 방식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내 경우에는 배타적인 국내 온라인 방송 서비스 사이에서 만족스러운 선택지를 찾지 못했기에 선택 자체를 포기했다. 볼만한 프로그램을 골라 볼 수 없어서 부모님이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포기했던 것처럼.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소비자가 선택을 포기하면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회사들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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