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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9 18:11 수정 : 2019.07.30 12:11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창경궁 옆 길가엔 허름한 국립과학관이 있었다. 소풍길에 한두번 들렀던 기억이 난다. 엉성하게 전시된 기계들은 그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이만 이용하던 국립과학관은, 국립서울과학관으로 개명하더니, 진짜 국립어린이과학관이 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0년에 어린이 국립과학관 네 곳을 더 짓겠다고 발표했다. 과학자가 되는 데 과학관은 내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린이과학관이 한국 과학계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한국엔 136개의 과학관이 있다. 국립과학관이 9곳, 공립이 87곳, 사립은 40곳에 이른다. 한국의 과학관 수가 선진국에 비해 적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진국 과학관은 대부분 사립이다. 한국처럼 관 주도로 과학관을 건립하는 사례는 예외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3년까지 박물관 및 미술관 186개를 확충한다고 한다. 문화국가로 가는 길이 토건형 박물관 설립으로 이루어질 수 없듯이, 과학국가로 가는 길도 과학관 설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에만 유일하게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자연사박물관의 필요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없다. 자연사는 과학의 여러 분과 중 한 분야에 불과하다. 자연사박물관의 기본적인 임무는 동물, 식물, 광물의 표본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즉, 자연사박물관은 과학관이라는 형태로 진화한 전시관의 특수 형태이며, 이미 한국 과학관의 상당수는 자연사 전시를 담당하고 있다.

자연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 중 하나로 ‘자원개발을 통한 국민 복지’가 있는데, 한국은 이미 국가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를 통해 생물 및 생태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 외에 국민의 문화적 긍지와 정체성의 확립, 국민의 과학문화적 소양과 생명존중사상의 고양 등의 목표는 과학관과 박물관이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에 관한 논의는 선동적이며, 과학계 전체에 이익이 되는지도 불투명하다.

한국 과학관 대다수는 연구 및 교육의 기능은 축소한 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관람 및 전시 기능에 치우쳐 있다. 선진국 자연사박물관엔 다양한 과학분야의 연구실이 있고, 이들의 연구가 해당 박물관의 특성이 된다. 특히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클로드 베르나르가 10년 동안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생리학을 근대적 의미의 과학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최신 생물학 연구가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유럽 최고의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가 쫓겨나자, 박물관은 급격히 쇠퇴했다.

박물관의 기원인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은 원래 첨단 연구를 수행하던 국립연구소였다. 하지만 한국의 과학관은 청소년 여가시간을 담당하는 오락기관이다. 세금으로 과학관을 더 짓기 전에, 얼마나 많은 박사급 기초과학 인력이 한국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국립대에서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몇명인지도 세어보면 좋겠다. 한국 과학의 문제는 국립자연사박물관의 부재가 아니라, 기초과학자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정책적 실패에 기인한다. 청소년이 과학자의 꿈을 꾸고, 과학이 한국 사회를 진보하게 하려면, 더 많은 기초과학연구소를 건립해서 과학자들의 연구가 안정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게 순서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과학문화 확산을 의제로 삼았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과학문화 확산이 한국 과학계에 정말 시급한 문제인가? 아니다. 한국엔 제대로 된 기초과학연구소가 없고, 기초과학자의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따라서 세계적인 발견이 없고, 그래서 퍼질 과학문화가 없는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전쟁에서 드러난 한가지 사실은, 오랜 시간 기초과학에 투자한 축적의 위력이다. 일본의 폭력에 분노한다면, 국민 세금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 과학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건, 과학관이 아니라 연구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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