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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3 17:42 수정 : 2019.04.03 19:10

주승현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봄 학기 첫 수업시간에 수업 진행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교수님은 커피를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지난 학기에도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는데, 내가 쉬는 시간마다 커피를 마시던 기억을 떠올린 것 같다. 커피 이야기로 이날 수업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지만, 다른 곳에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커피를 계기로 불편하지만 익숙한 경계선에 서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북한 출신의 한국인이다. 북한 출신인 것이 밝혀지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한국에 와서 제일 좋았던 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반공시대에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이제는 식상하거나 관제 느낌이 나는 답변으로 들릴 것이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가 떨떠름한 상대의 표정을 여러번 보곤 했다. 담담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씁쓰름함과 함께 아직 내가 ‘시민권’을 온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경계선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상대방은 은연중에라도 북한과 비교되는 한국의 우월적인 ‘무엇’이나 북한이 열등했었다는 ‘고백’ 비슷한 읍소를 기대했던 것일까. 어찌 됐든 내가 제일 좋았던 것은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이 맞고, 그다음은 ‘소신껏 말할 수 있는 풍성한 자유로움’에 관한 것이다.

북쪽에서 커피를 접해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커피라는 용어 자체가 일상적이지 않을 때 함께 그 쓴맛을 경험했던 친구와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반쯤 비운 커피잔에 ‘쓴소리’를 채운 적이 있다. 이후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 커피를 멀리했지만, 대학 공부와 회사에서의 잦은 밤샘작업 등이 커피를 가까이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즈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쪽 노동자들이 남쪽 기업에서 제공한 커피로 허기진 배를 달래려다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충혈된 눈으로 다음날 출근한다는 카더라식 소문이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은 북한 곳곳에 커피 문화가 들어선 모양이다. 몇년 전만 해도 한국에 갓 입국한 북한 출신의 친구는 쓴 커피를 마셔대는 나를 두고 ‘본토인’(한국 출신을 지칭)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최근 북한에서 나온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이 북한에서부터 좋아했던 여러 종류의 커피를 이야기하면서 한가지 맛에만 충실한 나는 수준이 낮은 편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도 커피가 유행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게 아리송한 정보가 넘쳐나는 만큼, 바야흐로 북한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도 천양지차로 읽힌다. 최근에는 기대와 회의론으로 양극화돼 있다. 어느 북한 전문가가 남북한의 태도를 커피를 내리는 물의 온도에 비유한 적이 있다. 커피를 내리는 데 필요한 물의 온도가 90도라고 할 경우, 한국 사회가 북한을 보는 시각은 90도로 온도가 올라가야만 북한의 변화를 인정하려는 진영과 90도가 되기 위한 40~50도의 과정도 변화로 인정하려는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사실 문제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남북관계이든 분단 상황이든 대결로 고착된 불변보다는 옳은 해결로 향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곧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정체된 듯 보이는 분단체제는 희망으로 가득한 봄도 있었고 엄동설한의 추위도 있어왔다. 분단 극복에 대한 우리의 심정적 기대는 100도에 가깝지만, 엄혹한 분단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은 겨울의 문턱 수준이다. 북한과 그곳 주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물을 때 선뜻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이중적인 시공간을 넘어 북한 주민들이 준비하는 봄이 우리의 봄과 같아야 하고 우리가 바라는 번영이 그들의 미래와 같을 때 한반도 평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봄 학기는 4월에 시작된다. 봄 학기를 맞는 북한의 학생들에게도, 다시 5월의 잔인한 ‘보릿고개’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북한 주민에게도 도래하는 한반도의 봄만큼은 두려움을 넘어선 희망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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