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리는 4층 강당까지 자녀의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른 학부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인터넷 방송에서는 이제 막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이 휠체어를 타고 교내 식당을 이용하고 문구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는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보았다. 3월의 신입생들로 가득한 좁고 북적이는 공간에서 영상 속 새내기는 당당했지만, 책을 사고 식판을 드는 일만으로 녹초가 되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애인 대학 신입생에게 3월은 식당에서 식판을 받는 요령을 익히고, 이용 가능한 화장실을 확인하며, 학교를 오가는 대중교통 타는 법을 연습하는 시기다. 동아리방이 있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수업에 필요한 시각장애인용 도서는 아직 제작되지 않아서,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도우미가 배정되지 않아서 간신히 수업시간 자리만 채우는 때다. 물론 그마저도 최소한의 장애 학생 지원제도가 있는 대학 이야기다. 강의실, 식당, 서점, 도서관, 학생라운지 등 온갖 장소에서 여전히 장애 학생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얼마 전 나는 한 대학에서 열린 학회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장애인 화장실 표시가 계단 위 1.5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직원과 학생들에게 물어도 다른 길은 없다고 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휠체어를 등에 짊어지고 양팔로 계단을 기어오른 뒤 다시 휠체어를 바닥에 펼쳐 화장실을 이용했다. 정말이다(그럴 리가). 어떤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도우미 학생이나, 청각장애나 난청이 있는 학생을 위한 문자통역을 불편하게 여긴다. 노트북 타이핑 소리가 시끄럽다거나 자신의 강의 내용이 기록되는 일이 탐탁지 않다는 이유다. 장애인 대학생은 이 모든 상황에 맞서는 ‘전투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필요를 정확히 설명하고 담당자와 대화하는 협상력, 최후까지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때로 학내외 인권기구 등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는 대담성 말이다. 학생 개인에게 전투를 요구하는 일은 부당하지만, 전투력이 장애인 대학생에게 독일문학의 이해나 선형대수학보다 더 중요한 교양필수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초·중·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평온할지 모르지만 그 시간 부모가 대신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학교의 환경과 제도, 구성원들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개선되고 있다. 어떤 학교들은 확실히 훌륭하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신입생이라면, 3월의 캠퍼스에서 때로 외롭고, 분하고, 비참했을 것이다. 4월부터는 달라야 한다. 예외로 취급되고, 귀찮고 번거롭고 안타까운 손님처럼 남을지 그렇지 않을지가 이제부터 결정된다. 14년 전 4월 나를 비롯한 장애인 대학생들은 실명을 게시한 대자보를 쓴 적이 있다. 이 글의 일부를 4월의 신입생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50퍼센트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인 세상에서 대학을 다니는 우리 장애 학생들은 감히 이 동정을 거부하지 못하고 교육을 받게 해준 여러 곳의 은혜와 배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손님으로 얹혀사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상으로, 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4월20일의 불쌍한 장애인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와 주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물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걸을 수 없는 다리를 걷게 하고, 들을 수 없는 귀로 소리를 들으려 애쓰며, 볼 수 없는 눈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는 학교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몸의 차이로 차별을 겪지 않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갈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장애인이다. 그 어떤 낙인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애를 극복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칼럼 |
[공감세상] 4월의 신입생에게 / 김원영 |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리는 4층 강당까지 자녀의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른 학부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인터넷 방송에서는 이제 막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이 휠체어를 타고 교내 식당을 이용하고 문구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는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보았다. 3월의 신입생들로 가득한 좁고 북적이는 공간에서 영상 속 새내기는 당당했지만, 책을 사고 식판을 드는 일만으로 녹초가 되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애인 대학 신입생에게 3월은 식당에서 식판을 받는 요령을 익히고, 이용 가능한 화장실을 확인하며, 학교를 오가는 대중교통 타는 법을 연습하는 시기다. 동아리방이 있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수업에 필요한 시각장애인용 도서는 아직 제작되지 않아서, 학교생활에 도움을 줄 도우미가 배정되지 않아서 간신히 수업시간 자리만 채우는 때다. 물론 그마저도 최소한의 장애 학생 지원제도가 있는 대학 이야기다. 강의실, 식당, 서점, 도서관, 학생라운지 등 온갖 장소에서 여전히 장애 학생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얼마 전 나는 한 대학에서 열린 학회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장애인 화장실 표시가 계단 위 1.5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직원과 학생들에게 물어도 다른 길은 없다고 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휠체어를 등에 짊어지고 양팔로 계단을 기어오른 뒤 다시 휠체어를 바닥에 펼쳐 화장실을 이용했다. 정말이다(그럴 리가). 어떤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도우미 학생이나, 청각장애나 난청이 있는 학생을 위한 문자통역을 불편하게 여긴다. 노트북 타이핑 소리가 시끄럽다거나 자신의 강의 내용이 기록되는 일이 탐탁지 않다는 이유다. 장애인 대학생은 이 모든 상황에 맞서는 ‘전투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필요를 정확히 설명하고 담당자와 대화하는 협상력, 최후까지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때로 학내외 인권기구 등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는 대담성 말이다. 학생 개인에게 전투를 요구하는 일은 부당하지만, 전투력이 장애인 대학생에게 독일문학의 이해나 선형대수학보다 더 중요한 교양필수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초·중·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평온할지 모르지만 그 시간 부모가 대신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학교의 환경과 제도, 구성원들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개선되고 있다. 어떤 학교들은 확실히 훌륭하다. 그럼에도 장애가 있는 신입생이라면, 3월의 캠퍼스에서 때로 외롭고, 분하고, 비참했을 것이다. 4월부터는 달라야 한다. 예외로 취급되고, 귀찮고 번거롭고 안타까운 손님처럼 남을지 그렇지 않을지가 이제부터 결정된다. 14년 전 4월 나를 비롯한 장애인 대학생들은 실명을 게시한 대자보를 쓴 적이 있다. 이 글의 일부를 4월의 신입생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50퍼센트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인 세상에서 대학을 다니는 우리 장애 학생들은 감히 이 동정을 거부하지 못하고 교육을 받게 해준 여러 곳의 은혜와 배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손님으로 얹혀사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상으로, 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4월20일의 불쌍한 장애인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와 주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물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걸을 수 없는 다리를 걷게 하고, 들을 수 없는 귀로 소리를 들으려 애쓰며, 볼 수 없는 눈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는 학교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몸의 차이로 차별을 겪지 않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갈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장애인이다. 그 어떤 낙인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애를 극복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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